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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ug 29. 2020

버거웠던 마음에 불을 비추다

"집에 가고 싶다"


얼마만이었을까.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인내심이 강한 내가 직장에서 집에 가고 싶다고 얘기한 일은. 출근하자마자, 일이 쌓여갈 때, 졸음이 밀려올 때, 퇴근 직전에 새로운 일을 받으며 나는 집을 생각했다. 표현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친한 사람일지라도 나는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지 못했다. 짐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곁에 있는 사람들의 곤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친구와의 다툼으로, 누군가는 상사와의 갈등으로, 누군가는 가족 문제로 고민했다. 나의 사정을 털어놓음으로써 그들의 시름을 깊어지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충분히 힘겨워 보였으니까.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내가 겪는 힘겨움이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니, 나는 알아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다고, 그 정도로 지금 내가 힘들다고 누가, 어떻게 듣던 신경 쓰지 않았다. 말하고, 또 말했다. 지쳐있다는 걸 인식할 수 있도록. 아니, 인식할 때까지. 


나는 결국 가장 늦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오늘 끝내지 못한 일들이 내일 나의 발목을 잡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인턴 주제에, 얼마나 높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겠다고 야단일까. 수고했다는 격려가 다일뿐인데. 하루 종일 집을 떠올렸으면서도, 집을 주제로 돌림노래를 불렀으면서도, 나는 짙은 밤이 되어서야 신발을 벗을 수 있었다.


캔맥주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스탠드를 켜고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어, 흘러나오는 음악에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내가 바라던 것, 기어코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던 이면에는 쉼에 대한 바람이 있었던 걸까.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좋아하는 가삿말에, 은은한 스탠드 조명에 이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전제는 개떡 같이라도 말을 해야 되기에 나는 그 이해를 전적으로 받아본 경험이 드물다. 만약 마음에 있는 말을 선뜻 꺼내기 어렵거나, 고민 끝에 꺼낸 말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적어도 나 스스로만큼은 찰떡 같이 알아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하다면 오늘의 나는 안쓰러웠다. 일을 서둘러 처리하느라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일 틈을 주지 않을 거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남발했으니까. 알아주기를 바랐다면, 그들이 알아줄 시간을 내어주어야 했는데. 모니터를 보며 혼잣말을 하는 나에게 과연 그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었을까. 나조차도 등한시하는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들으며.     


2평 남짓한 방에 혼자 앉아 있지만, 결코 허전하지 않다. 꽉 차게 느껴진다. 음률대로 몸을 편하게 기울이며, 흐르는 눈물에 환희를 맛보며 나를 되찾는다.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이 나 그 자체이다. 나만이 오직 존재하고, 전율로 물들어가는 내 방에는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에 머무르며 나는 쉬고 있다. 영원했으면 좋겠다. 이 밤은. 기어코 아침은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잠들기 전까지 더 음미하고 싶다. 들이마시는 숨마저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벅차오르는 이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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