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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Sep 06. 2020

가을이 다시 찾아왔지만

가을이 왔다. 날씨나 절기를 찾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아침, 저녁으로 후끈한 여름 열기를 달래는 시원한 속삭임이 들린다. 하늘을 메운 나뭇잎 아래를 걸으면 속삭임은 더욱 뚜렷해진다. 


내음이 달라졌다. 풀향이 진하게 베인 꿉꿉한 냄새가 여름내 났다면, 가을은 옅고 깊다. 봄과 같은 달콤한 향기는 아니지만 그득한 내음이 피어난다. 본격적인 가을로 들어서기 전, 초가을은 푸른 하늘에 떠 다니는 솜이불을 덮고 어디로든 나아가 단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편안함을 선물한다. 


가을만 되면 바깥바람을 쐬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그래서일까. 고요하고 차분해지는 이 기분을 나는 가을마다 느낀다. 제주도 여행을 갔던, 2015년 가을이 떠오른다. 누나의 추천으로 올레길 도보 여행을 떠났었다. 하루에 한 코스씩 걸어서 이동하는, 혼자서 하는 여행 치고는 꽤나 파격적이었던 당시 일정이 떠오른다. 


코스 끝 지점에 그날 묵을 숙소만 예약한 채, 나는 자유로이 걸었다.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쉬고,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눈앞에는 바다가, 산이, 하늘이 끝없이 펼쳐졌다. 첫 번째 직장에서 퇴사하고 겪고 있던 미래에 대한 방황을 깨끗이 씻어내는 데에는 '자연'이 있었다. 


세상에서 멀어져,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타인과 세상의 시선은 사라지고, 오직 '나'만이 남았다. 가빠오는 호흡, 저벅거리는 발소리, 차오르는 땀, 타는 듯한 갈증은 걷는 나에게 살아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걸을수록 나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수월했다. 2019년 봄, 나는 두 번째 올레길 여행을 떠났다. 이유는 비슷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이었다. 불안감을 덜어내기 위해 나는 걸었다. 둘째 날 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걷느라 지쳤던 몸을 이끌고 월정리 해변 근처에 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모습은 여전히 생생하다. 


걸으며, 나는 나와 만난다. 걸을수록 나에게 귀 기울인다. 타인과 세상의 잣대로부터 해방된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낸다. 들을수록 '나'로 선명해진다. 어떠한 일이든 내가 원하는 방식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걷지 않으면 타인과 세상에 짓눌려 나의 언어를 잃는다.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걷기에 적절하니까. 하지만, 코로나-19는 이 좋은 계절을 칩거하며 보내게 한다. 원래대로라면 어디든 걷고 있을 텐데. 사회적 거리두기 2.5가 시행되고 있는, 서울에 사는 나에게는 꿈과 같은 이야기이다.  


두 눈을 조심스레 감아본다. 걷고 있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그려진다. 올레길을 걷고, 또 걸었던 그 시절 방황하는 내가 보인다. 바람 부는 대로, 파도소리를 따라 걸으며 되찾았던 미소가, 방 안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다가온다. 느껴진다. 가을이 왔다.  


태풍 소식이 또한 주기적으로 들려온다. 자연스레 뉴스를 수시로 찾아본다. 부디, 부디 큰 피해 없이 태풍이 지나가기를, 가을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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