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끝나간다. 사실 연휴라고 해서 일상이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빠가 장남이어서 그동안 차례를 집에서 지냈었지만, 작년부터 차례를 지내지 않고 있어서 친척들과의 왕래가 줄었다. 물론, 명절 때마다 호국원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갔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이마저도 끊겼다. 우리 가족은 여느 때처럼, 아니 여느 때보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시간이 늘었다고 해서 대화가 느는 건 아니다.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추석 전날 거실에 도란도란 모여 친척들과 전을 붙이고, 밤을 까고, 차례를 준비하던 모습과 대조적으로 아빠는 안방에서, 엄마는 거실에서, 나는 방에서 각 자의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하거나, 거실을 오갈 때 짧은 대화만 이어질 뿐, 진득이 앉아 나눌 수 있는 소재들은 기꺼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삼촌들이 왔다면 나의 취업이나 결혼에 대해 물었을 텐데. 그 상황이 결코 달갑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웠다. 왜 안 하는지에 대한 질의가 아니라 관심에서 비롯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나의 취업이나 결혼에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먼저 소식을 들려주기를 그저 기다리는 걸까.
문득 작년 가을에 아빠, 엄마와 함께 떠났던 부산 여행이 생각났다. 교통편을 고려하여 1박 2일 동안 패키지로 여행을 떠났었다. 오가는 데만 반나절 이상을 썼던, 그때의 여행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처음으로 차례를 지내지 않고 가족끼리 보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광화문으로 갔다. 어떤 버스인지 헤매며 출발 직전에 우리 가족은 무사히 관광버스에 올랐다. 좌석은 엄마와 아빠가 함께였고 나는 체격이 큰 남성과 나란히 앉았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첫 관광지에 도착하였고, 중간에 들렀던 휴게소에서의 음식을 소화할 겸 사찰 곳곳을 걸었다.
엄마의 낡은 핸드폰을 뒤로하고, 최신형 핸드폰을 가졌던 내가 그날의 사진작가가 되었다. 나무 옆에 선 모습도 찍고, 아빠와 어깨동무한 장면도 찍으며 어쭙잖은 재능을 자랑했다. 하이라이트는 자갈치 시장에서였다. 저녁으로 밀면을 먹고 시장을 구경하다가 시간에 맞춰 모이기로 한 장소로 갔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가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빠는 여기가 맞다고 하는데. 다른 곳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그 장소로 달려가니 출발 직전의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자갈치 시장에서 미아가 될 뻔했다며, 자신감 있게 설명하는 아빠에게 가끔씩 브레이크를 여전히 걸고 있다.
부산 밤바다를 걷던 시간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어느 바다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생생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바닷바람은 거세게 불어왔다. 언제 뒤집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간이 우산 두 개를 나누어 쓰며 우리는 다른 일행과 떨어져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산책로가 끝나갈 즈음 엄마는 말했다. "차례를 안 지내서 너무 좋아."라고. "쫓기듯 여행하는데 그래도 좋아?"라고 물으니 "그래도 좋아."라고 엄마는 대답했다. 엄마는 아마 모를 것이다. 이 말을 하던 엄마의 표정이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차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추석이 되기 며칠 전부터 전전긍긍하던 엄마의 모습, 추석 당일 새벽까지 탕을 끓이던 엄마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이때부터 나는 부산에 오기까지 8시간이 걸렸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도망치듯 여행했던 그 시간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은 라떼향을 풍기는 어른들이나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아니면, 나도 혹시 누군가에게 라떼 향을 풍기는 어른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조심스러워진다. 다짐했다.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방에 칩거하며 묻는 대답에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던 이번 연휴의 스스로를 반성하며, 연유의 마지막인 오늘 밤만큼은 '그때가 좋았지' 라며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족과 함께 갖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