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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Mar 05. 2022

자신의 한계를 정해 보는 일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 해 봤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분야에서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할 때가 많다. 대학을 진학하려는 학생이라면 성적과 관련된 일에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노력하는 직장인이라면 업무와 관련된 일에서 보다 잘 해내는 자신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직장을 다닐 때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처음 해 보는 일들이 낯설고, 상사에게 여러 번 설명을 듣고 혼자 시도해 봐도 좀처럼 능숙해지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직장에서의 관계는 학생 때와는 달리 딱딱하고, 상사의 컨디션에 맞춰 행동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일은 드물었다. 나의 '최선'은 나를 위한 최선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시에 내가 세웠던 좋은 사람의 기준은 친절하고, 부드럽고, 누군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능히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는 최선이라고 믿는 나의 노력 정도를 눈대중으로 가늠하며 나름의 선을 그었다. 그 선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기준선이자 내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상사나 동료, 후배가 인정해줄 만한 선을 가정하며 그었기에 나를 위한 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가 쏟은 최선의 노력은 결국 누군가를 향한 일이었지만, 그 누군가 또한 내가 그은 선에 동의하거나 도달하기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들을 위한 선이라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어느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선을 그어두고 나는 스스로를 내몰았다. 저 선에 도달하지 못하면 너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너의 어설프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나가게 될 거라고. 


  최선이라고 믿고 그은 선이 나의 능력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동료들과 있을 때면 주변에 cctv가 쫓아다니는 것처럼 스스로를 의식했다. '나는 과연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을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나의 말수는 줄어들고, 행동은 조심스러웠으며, 감정을 감추는 데 급급해졌다. 잦은 속 쓰림은 첫 직장이 나에게 안겨 준 삶의 교훈이다. 속 쓰림이 찾아올 때면 나는 최선이고자 노력했던 당시의 나를 한 번씩 떠올린다. 나에게 '최선'은 하나의 목표였다. 일과 관계에서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주목받기 위한 선을 '최선'이라는 이름으로 그어두었으니까. 하지만 그 선을 나를 기준으로 긋지 않았기에 온갖 고생을 경험하였다. 타인은 내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대신 세워줄 수 없었고, 타인 자체는 나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다.


  최근, 직장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며 최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일과 관계에서 모두 잘 해내고 싶은 마음으로 명확한 선을 그어놓은 채, 그 선에 도달해야 한다며 닦달하는 스스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최선이라는 이름으로 굵고 진한 선을 그리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가느다란 실선으로 최선을 그어두는 연습을 시작했다. 이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과 유사하다. 실선을 그어둠으로써, 목표를 이루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꾸짖음과 질책보다는 나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는 깨우침이나, 내 의지에 의해 그은 선인지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그 자체도 요즘 나에게는 가혹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으면 어떡하지', '동료들이 나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후배들이 나에게 배울 점이 없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들이 선을 더욱 진하게 그려야 한다고 나를 재촉한다. 가빠오는 호흡이, 뛰는 심장이 실선으로 최선을 긋는 일을 멈추어야 된다고 경고한다.


  이제 나는 안다. 그저 나의 우려였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하거나, 내 곁을 떠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컸던 나의 가정이었을 뿐이다. 들고 있던 고개를 내려 주변을 바라본다. 하늘을 볼 때에는 '되고 싶은 나', '되어야 하는 나'에 대한 생각이 컸다. 반면, 주변을 둘러보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말투에서, 표정에서, 행동에서 느껴진다. 더 노력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진실한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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