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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an 30. 2022

익숙해지지 않는, 나의 영원한 슬픔

  평일, 직장인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그건 분명 점심시간일 것이다. 상사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라면 마냥 편하기는 어렵겠지만,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며, 생각에 빠지며 업무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는다.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점심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배는 고팠지만 동료들과 어울리며 밝은 척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특히, 사람 만나는 일을 하는 이라면 더더욱 자유롭기 어렵다. 내 마음은 슬픔으로 그득했다. 누군가, 나를 모르는 누구라도 내 어깨를 매만지며 "괜찮아요?"라고 물으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회사 앞에 새로 생긴 찌개 집에 가보는 건 어떨지 물어보는 환한 동료들 앞에 내 슬픔이 자리할 곳은 없어 보였다.


"저 오늘은 배가 안 고파서 점심 안 먹을게요..."


  한 번씩 점심을 굶어야 속이 편하다고 얘기하던 나는 그날도 점심을 먹지 않을 수 있었다. 배에서는 사실 '꼬르륵'하는 소리가 연신 울려댔지만, 동료들의 말에 웃으며 반응하다가는 나사가 빠질 것만 같았다. 나는 하릴없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키보드는 미동조차 없었고, 화면 보호를 위해 꺼진 모니터를 켜기 위해 마우스만 몇 차례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때, 인턴 선생님 한 명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점심 드시러 안 가세요?" 라는 나의 물음에 그는 상담실에서 상담을 정리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고 했다.


   평소에 얘기를 자주 나누지 않는 선생님이었지만, 나는 당시 절박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나의 슬픔의 일부를 들려주었다. 우리 사이에는 10M 정도의 간격이 있었지만, 사무실 안에는 둘 뿐이었고 나에게는 그러한 거리를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노력해 온 지난날들이 후회된다고 얘기했다. 스무 살 때, 대학교에 입학하고 봉사활동을 시작하며 내 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가위질조차 어려워하던 사람이었다. 삐뚤빼뚤하게 잘린 종이를 보며 부탁한 선생님에게 다시 뽑아달라고 할 자신은 없고, 다시 오릴 수는 없어서, 말하지 못하고 한참을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던 적도 있었다.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은 더욱 처연했다. 친구들과 친해져 본 경험이 없던 나는 대학처럼 느슨한 공간에서 관계 맺는 걸 유독 어려워했다. '나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앞서야 했는데. 나와 함께 어울려 주는 그들이 너무 소중해서 맞추고 따르기에 급급했다. 나는 그렇게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둥글한' 사람이 되었지만, 정작 나 스스로에게는 '모난' 사림이 되어버렸다. 가위질에서조차 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으로 그냥 오리지 못한 채 더 좋은 방법을 고민하고,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일들을 끊임없이 상상하던 나는 비로소 일을 잘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불렸다. 되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자존감이 높고, 친구들과 두루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에서 가위를 내려놓고, '친구들이 떠나가지는 않을까?' 마음의 문을 세게 움켜쥐던 손을 펼 수 있다면. 아니, 처음부터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긴 독백의 마지막으로 인턴 선생님에게 글로 쓰며 많이 표현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많이 얘기하기도 했는데, 여전히 슬프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 얘기를 들은 인턴 선생님은 슬픈 눈을 하고 대답했다. 


"슬픔을 아무리 많이 얘기한다고 해도, 슬픔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덜 느낄 뿐..."


  나는 자주 울컥하며 간단한 자극에도 눈물이 흐르는 이 감정을 슬픔이라고 불렀는데, 말로 꺼내며 슬픔을 느끼는 이유가 명확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대조차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 적어도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나를 알아달라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거나, 자신의 어려움을 얘기하고 있거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생각, 감정, 행동을 멈추도록 당부하고 내 이야기를 꺼내면 되는 걸까. 내가 겪는 일보다 자신의 일이 더 크다고 말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의 작고 사소한 어려움을 알아줄 곳은 어디일까. 만약, 가위질을 어려워하던, 친구 사귀기를 어려워하던 그날들의 내가 그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한다. 주변에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니라 내 마음을 꺼내 보이는 방법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나는 여전히 슬프다. 노래를 듣다가도 특별할 것 없는 가사에 눈물이 흐르고, 늘 보는 햇빛인데도 특별하다는 듯 올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은 나의 슬픔이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거야' 하는 생각은 나의 눈물샘이다. '나의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일까?' 하다가도 이내 닫아버리는 나의 선택은 오늘도 씨름하고 있는 나의 오랜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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