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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Feb 13. 2022

나에게 맞게, 느리게 걷는다는 것

제가 잘하게 된 일 중에 하나는 걸음 속도를 다른 누군가에게 맞추는 일이에요. 엄마, 아빠와 산책을 하다 보면 엄마는 주로 뒤처지는 편이에요. 그런 엄마에게 걸음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멀어져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아도 조바심을 덜 내게 되었어요. 


유진상가를 지나 홍제역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이 길은 원래 좁기도 하고 노점이 깔려 있어 때로는 성인 두 명이 나란히 걷기에도 부족할 때가 있어요. 일요일이라 그런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는 자연스레 제 앞을 걷고 있던 할아버지의 걸음을 따르게 되었어요. 


제 걸음은 분명 직장에서의 속도에 맞춰져 있었어요. 무엇이든 빨리 처리해야 하는 직장에서 느린 동작은 사치에 가까워요. 할아버지에게 걸음을 맞추던 순간에 가슴이 쿵-하고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기한이 임박해오는 일, 쉴 틈 없이 다가오는 말, '더 빠르게'만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그치던 저에게 할아버지의 걸음은 답답했으니까요.


누군가에게 걸음을 맞춘다는 건,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간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가자 눈에 보이지 않던 길의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오란다, 김, 생선, 귤, 옥수수, 붕어빵이 제가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어요. 


할아버지는 사라지고 저는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어요. 저의 걸음은 할아버지를 따라가던 속도와 비슷해요. 어쩌면 오늘 저의 걸음은 할아버지를 따라한 것이 아니라, 비로소 저만의 걸음을 되찾은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누군가에게 베짱이처럼 보일 수 있는 이 걸음이, 이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하게 느껴지니까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쉬어보았어요. 세상이 제 마음으로 들어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눈을 감았어요. 걸음을 옮기다 멈추어, 다시 눈을 감았어요. 숨을 크게 쉬었어요. '그래, 이게 나구나' 확신에 찬 눈빛으로 느리게, 더 느리게 계속 걸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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