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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ug 14. 2022

작은 변화라도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면,

몇 주전,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배운 것은 많았다. 오늘은 그중에서 한 가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둘째 날 새벽이었다. 눈을 떠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둥과 함께 요란한 빗소리가 창틈으로 새어들었다. 내리치는 빗방울에 놀란 마음도 잠시, 우산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날 새벽에는 아침 공양을 하려고 했다. 별도로 알람을 맞추어 두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굳은 결심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눈은 저절로 떠졌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비는 내렸고, 가진 우산은 없었다. 이런 날씨에 비를 뚫고 공양을 하러 가자니 젖은 몸으로 의자에 앉는 것이 실례일 것만 같았고, 실례를 무릅쓰고 끝내 숟가락을 든다 해도 공양에 눈이 멀어 험궂은 날씨에도 달려온 부끄러운 사람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아침 공양을 안 하러 가자니 그럴싸한 핑계를 대는 것 같았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나는 어려워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와 같은 생각에 골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인식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좀처럼 편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사찰은 나에게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그곳에 왔던 나와 같은 사람들의 목적은 수행이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고, 마주하고, 저항하고, 분노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러 온 사람들에게 과한 친분의 시간은 불필요하다. 가끔씩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합장하며 가볍게 목례한다면 그 이상의 언어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사회에서의 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다양하게 수집한 다음에 그에게 맞는 소통 방법을 사용하는 편이었다.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익살스럽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진지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진지한 사람으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상대방이 장난을 좋아하더라도 어떠한 장난을 어느 선까지 허용하는지에 따라 가려할 만큼, 사람을 대할 때면 고려하는 점이 많았으니 나에게 사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다는 것은 행동하지 말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10분 남짓의 시간 동안 고민했다. 아침 공양을 하러 갈지, 말지에 대해. 누군가에게는 작고 하찮은 고민일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지겹게 따라다니던 일생의 고민이었다. 단순히 밥을 먹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의식에 굴복하느냐, 그 의식을 넘어 자유롭게 행동하느냐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끝내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행동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 년간 회사생활을 하며 이미 숱한 후회를 했었다. 대부분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였다. 특히, 하던 일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가장 후회스러웠고, 그것은 결국 "힘들어요"가 아닌 '힘들었어요'라는 마음속 메아리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아침 공양을 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관문을 넘어야 했다. 가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비를 덜 맞기 위해 뛰어서 이동한다는 것이 또한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템플스테이 안내소가 떠올랐다. '그곳에 가면 우산을 빌리거나 살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새벽 시간이라 근무하는 분이 계실까?' 생각하면서도, 앞서 말한 또 하나의 관문이 나의 발목을 잡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잘 요청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능력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타인에게 고백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께서는 내가 해야 할 삶의 선택들을 대신해주셨다. 그것은 부모님의 그림자였고, 사랑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삶의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주고자 노력하셨고, 이는 부모님께서 나에게 주신 순수한 사랑이었다. 나는 이러한 부모님의 양육 방식에 일부 영향을 받았으며, 그러한 경험들은 또한 나의 그림자가 되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도움을 받는다. 나는 내가 도움을 받았다고 기억하는 일뿐만 아니라, 여전히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스스로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특히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상황은 언제나 두려웠다.


나는 또다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우산을 빌릴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 민폐인 것 같고, 어쩌면 아직 열지 않았을 사무소에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실패하는 것 같아 두려웠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회사에서의 나는 또한 도움을 요청하는 걸 어려워했다. 내 곁에는 유능하고 좋은 동료들이 많았지만, 능력 있는 사람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상황에 맞지 않은 허황된 생각이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렇기에 서울로 돌아온 내가 이 날을 회사에서처럼 '실패 경험'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끼며 사무소로 출발했다.


사무소의 불은 꺼져있었지만, 그 앞에 우산을 파는 곳이 있었다. 근무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으므로 함부로 가져가는 것이 곤란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입금할 수 있는 계좌번호가 있었고, 나는 우산 값을 먼저 치른 이후에 우산을 꺼내 들었다. 그 우산을 쓰고 공양을 하러 가던 길, 공양하던 시간, 공양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던 길, 그날, 그 이후,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이 순간까지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나의 마음을 우선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여전히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렵지만, 나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필요하다면 도와달라고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끔은 성공하고, 때때로 실패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어떠한 상황이든, 그것이 날씨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펼쳐지는 제한된 상황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의 마음에 초점을 두고 행동하면 그것이 곧 스스로를 위한 진실한 행동이 될 거라는 것을. 


템플스테이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깨달음은 마음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에 따르지 않고, 참된 마음과 마주하고 기꺼이 실천하는 것이 나를 위한 길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Image by Florin Birjoveanu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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