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근무하던 대학교에서 축제가 열렸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취소되고 연기되던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학교가 떠들썩했다. 학교 안을 걸어 다닐 때면 어떤 가수가 온다느니, 어떤 부스가 들어온다느니 하며 학생들이 떠드는 얘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직원으로 근무했었기에 크게 흥미를 갖지 않으려 했다. 학생들을 위한 축제이기도 했고, 학교 행사에 관심을 갖기에는 하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가수가 공연을 위해 학교에 온다는 소식은 말하는 학생의 쪽으로, 공연이 열리게 될 곳으로 몸과 마음의 관심을 끌었다.
축제 당일이 되었다. A가수는 밤에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나는 그 시간까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저녁 7시 즈음이 되자 외부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A가수가 공연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궁금한 까닭에 건물 밖으로 나가보니 학생들의 커다란 외침이 귀에 꽂히듯 생생하게 전해졌다.
한편, 학생들을 이토록 열광케 하는 A가수의 무대가 궁금해졌다. 타인을 크게 의식하며 편하게 행동하는 걸 어려워하는 나도 환호보다는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크게 내지르며 어울릴 수 있을까.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공연장에서의 모습이 자연스러울 거라 예상되는 학생들 곁에서 어색하게 공연에 참여한다고 상상하니 끔찍했다. 나는 역시 공연이 열리는 테니스장이 아닌 사무실 밖에서 학생들의 함성과 A가수의 이전 무대를 떠올려보며 발가락을 까딱거리는 것 정도가 어울릴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날, 우리 부서에서 근로장학생으로 근무하던 K학생에게 A가수의 공연에 대해 물어보았다. K학생은 며칠 전 근무하며 나에게 A가수의 공연을 보러 갈 거라고 얘기했었다.
"어제 공연 잘 보고 왔어요?"
"네, 선생님. A가수 보려고 아침부터 맨 앞 줄에 서서 기다렸어요."
"아이고, 하루 종일 기다렸으면 힘들었겠네요."
"그런데.. 진짜 최고였어요!"
그의 반응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선 자세로 아침부터 공연을 위해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좋았다니. 만약, 나였다면 하루라는 시간을 공연을 보기 위해 고스란히 썼다는 점 때문에 A가수의 무대가 시작되어도 '하루 대부분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네' 하는 생각 때문에 편히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나였다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편히 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만족감이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K학생의 "최고"였다는 말과 함께 드러났던 티 없이 맑은 표정은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공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나의 관점에서 K학생의 실망스러운 결과를 예상했지만, K학생은 하루라는 기다림 끝에 펼쳐진 공연에 대해 엄지까지 치켜세우는 흥을 보여주었다.
그랬다. 즐겁고 신나는 일을 하는 데에는 그럴싸한 이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좋으면 그만이다. 하루를 기다렸든, 이틀을 기다렸든 기다렸던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괜찮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또한, 내가 A가수의 공연을 만약 보았다면 타인을 의식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토록 기쁘고 흥겨운데 주변 사람들이 뭐람. 어쩌면 '에라 모르겠다' 하며 춤추고 소리 지르는 나의 만나게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환희에 찬 눈동자와 녹아버린 긴장으로 맑아진 표정. 계곡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퍼지는 목소리와 내적 흥분을 고스란히 전달했던 K학생의 엄지는 기다려지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시도해보라는 메시지를 나에게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