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공부를 시작한 지 3년이 되었다.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다 보면 세월이 빠르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상담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우선 거치는 과정이 있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상담 내에서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는 상담을 긍정적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내담자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내담자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사용하는 언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의 사전적 의미보다는 그가 스스로 정의 내리는 언어의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처럼 내담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입장에서 대상이나 상황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요구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받아들이는 자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한 가지의 객관적인 사실이 있더라도 우리는 모두 다르게 지각한다. 우리의 내면에는 경험을 받아들이는 저마다의 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틀은 타고난 성향, 경험, 가치관, 문화 등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내담자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을 내담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적 체계에 대한 분석을 거쳐야 한다.
나는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다. 이러한 외로움을 때로는 소외감이라고 불렀고, 때로는 고립감이라고 불렀다. 내가 경험하는 외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억제하는 데에 있었다. 과거에는 마음에서 솟구치는 욕구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억압이라고 표현했지만, 현재는 순간마다 발견하게 되는 욕구를 부인하지 않고 느끼려 노력하기 때문에 억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구의 대부분은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나에게 머물 때에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달으며 행복감에 젖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내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러한 이유는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 행동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관계는 기본적으로 날 것의 모습을 띤다. 화목한 사이를 유지하다가도 작은 티끌로 번진 다툼으로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 사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개별적이며, 기대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실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싶다는 욕망이 자라날수록 인위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이러한 인위적인 행동은 내가 생각하는 개별적인 그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나에게 그러한 행동을 기대하지 않았으니 누군가를 좋아할수록 그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관계는 반복되었다.
사랑에 대한 욕구가 좌절될수록 누군가가 기적처럼 내게 다가와서 그간 받지 못한 사랑을 나누어 줄 거라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환상은 점차 구체화되었으며 사람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사람들에게 기대했던 모든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여유 있는 행동, 평온한 표정을 가진 가상의 인물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나는 나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마음을 열었고, 그렇지 않다고 느껴지는 사람과는 시간을 두고 점차 멀어졌다.
이러한 자기 분석의 과정을 거치며 나는 또한 내가 우울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울증의 진단 기준에서 나를 조명하면 명확해지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무기력감이나 무가치감, 공허감이나 불안감, 우울감과 더불어 죽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살아왔고, 이들은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다. 다양한 심리검사 결과에서도 나를 우울증으로 지목하였다. 나는 어쩌면 진단만 받지 않았을 뿐 우울한 삶을 오래전부터 계속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우울감이 내면에서 울렁거릴수록 내 마음을 알아줄 누군가가 나타나서 "괜찮아"하며 토닥여주었으면 했고, 그럴수록 우울감은 수위를 높여가며 이윽고 일상을 토사물 범벅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우울이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간의 삶을 돌이켜보면 더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도록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이들이 있었다. 조카들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서울에 살고 있는 서른다섯의 청년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는 거진 10년이 되었고, 결혼을 일찍 했다면 조카들 만한 자녀가 있을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가 조카들을 통해 치유를 경험했다고 적으려 하니 괜스레 얼떨떨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조카들과 보낸 시간들을 곱씹을수록 선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조카들은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조카들의 집에 들르면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으로 달려와 웃으며 나를 반긴다. 때로는 조카들의 반김이 격하여 서둘러 거실로 도망가야 할 때도 있지만, 현관에 들어서기 전부터 조카들이 좋아할 거라는 기대와 돌아오는 그들의 활기찬 반응에 이내 미소를 짓는다. 가끔은 조카들이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행동을 할 때에는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조카들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는 행동을 하는 것은 나에게 어려운 일이지만, 조카들과의 관계가 화목한 상태로 다시 돌아갈 것을 믿기에 나는 발가락에 힘을 잔뜩 주며 필요한 목소리를 낸다.
앞으로 만나게 될 글은 쌍둥이 조카들과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조망하는 삶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조카들과는 달리 나의 신체적 성장은 멈추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그들의 순수한 사랑이 내 마음의 자양분이 되는 경험들은 차분히 써 내려가고자 한다. 여전히 서투르지만 마음을 알아가며 나로서의 삶을 꿈꾸는 어느 우울한 청년의 이야기가 이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