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카들에게 따끼라고 불린다

by 두근거림

내 나이는 어느새 서른다섯이 되었다. 통일이 되어 군대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던 초등학생 때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선명한데, 먹고 살 일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렸을 적에는 지루할 때마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이 많았다. 시간이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흘러가며, 유한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젊음'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는 요즘의 나는 숨 쉬며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십 대 중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가지게 된 직업은 사회복지사였다. 사회복지학과를 나온 나에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사회복지사를 뽑는 곳이라면 대부분 눈여겨보았다. 조건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취업 자체가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직업으로서의 관계는 다른 차원이었다. 그렇게 두 곳의 사회복지기관을 경험하고 나서는 상담자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적성을 먼저 생각했다. 나는 사람들과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소하도록 돕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뿌듯했다. 대학원에서 다섯 학기를 마치는 동안 조교, 인턴, 자원봉사자로서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두 권을 책을 썼고, 사람들에게 가끔씩 "작가님"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생겼다.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에는 한 기관에 연구원으로 취직하여 기대하던 상담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현재는 다시 백수가 된 상태이다.


직업을 제외하고서도 나는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아들, 학생, 막내, 아저씨는 일반적으로 불리는 호칭이었고, 코가 크다는 의미로 지어진 코짱이라는 별명은 고등학교 때부터 불리던 친근한 표현이다. 이처럼 나는 그간의 삶에서 여러 호칭으로 불렸다. 대부분의 호칭은 '나'를 대신하였고, 호칭에 따라 나의 정체성은 변화를 일삼았다. 사회복지사로서는 친절함을 중요시했고, 상담자로서는 세심함에 힘썼으며, 코짱으로서는 친근함을 앞세웠다. 만약 그동안 불렸던 호칭들 중에 좋아하는 것을 단 하나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따끼'를 선택할 것이다. 따끼는 삼촌을 부르는 조카들만의 언어이다. 이 세상에서 조카들을 빼면 나를 따끼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자연스레 따끼라는 표현을 곱씹다 보면 보름달 같이 둥근 두 얼굴이 떠오른다.


조카들의 이름은 우준, 서준이다. 우준이와 서준이는 나와 조카, 삼촌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동네 이웃이기도 하다. 걸어서 십 분 남짓한 위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현재의 집에 서로 살았으니, 그들의 성장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둘의 몸무게를 합치면 나를 넘어서는, 건장한 조카들과의 첫 만남은 그들이 태어난 병원에서였다.


"수호야. 조카들 태어났대. 끝나고 연락해" 현장 근무를 하던 나에게 전화한 엄마는 말했다. 오래도록 기다려 온 조카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누나와 매형은 아이를 갖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혼하고 4년 만에 생긴 아이는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누나는 나에게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알콩이, 달콩이라고 소개해주었다.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담긴 듯했다. '갓난아이인 조카들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누나를 많이 닮았을까, 아니면 매형을 빼다 닮았을까?' 경기도 구리시 부근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일을 마치고 조카들의 생김새를 상상하며 충무로역으로 향했다.


누나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니 아이들을 면회할 수 있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했다. 다행히 조카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에 병원에 도착했고, 엄마와 매형과 함께 신생아들이 모여 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매형은 조카들의 이름을 말했고, 두 명의 간호사는 우준이와 서준이를 각 자의 품에 안고 다가왔다.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처음 조카들과 만났다. 우준이는 아빠와 할머니, 삼촌을 알아보는 듯 눈을 뜨고 있었고, 서준이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품에 안겨 있었다. 이 순간은 선선한 가을에 만난 윤슬처럼 반짝거리는 형태로 마음에 보관되어 있다. 가끔씩 꺼내어 볼 때면 따스한 햇빛이 반사되어 두 눈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따끼, 따끼" 조카들이 한 살쯤 되었을 때였다. 우준이가 나를 따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준이도 덩달아 따끼라며 나를 불렀는데, 그 뜻은 여전히 아무도 알지 못한다. 대화가 가능해졌을 때에 따끼의 뜻에 대해 물어도 우준이는 "몰라"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듣기 원했다기보다는 상황이나 역할에 따라 적절한 호칭을 들으며 살아왔다. 이러한 호칭에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저마다의 모습이 있었고, 나는 스스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타인에게 만족스러운 행동을 하기 위해 진실한 나는 자주 소외되었고, 외면하고 억압했던 여러 감정은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하지만 따끼라고 불릴 때에 나는 자유로움을 경험한다. 조카들은 나에게 특별한 모습을 기대하지 않는다. '나'이기에 좋아한다. 가끔은 놀아주지 않거나, 기대와 다른 행동을 하면 조카들이 실망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눈물로 그러한 실망감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얘들아, 놀자"라고 말했을 때, 달려들며 반길 그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기에 나는 어느 관계에서보다 편안하게 조카들을 맞는다.


조카들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따끼로서의 삶에는 제한을 두지 않게 되었다. 나이나 직업, 경제 능력과 같은 조건으로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나의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기에, 사랑하는 마음을 나에게 다시 내어준다. 여러 호칭 중에서 내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사랑을 오롯이 표현할 수 있는 호칭은 조카들이 앞다투어 부르는, 순수한 언어 '따끼'이다.


우준아, 서준아. 삼촌은 너희들과 처음 만난 날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일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였지만 너희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피곤함이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지. 건강하게만 자라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어. 한편으로는 시련과 고통이 끊이질 않는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단다. 당시에도, 현재에도 삼촌은 살아가는 걸 어려워하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너희와 마음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과정의 첫 시작이 그날이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할 따름이야. 그저, 감사할 따름이야. 삼촌 혼자 살아가던 세상에 나타나 줘서 고마워. 고마워.

trees-g54f6919fb_1920.jpg Image by Ulrike Leone from Pixabay


이전 01화나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