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확진자가 줄어들던 8월, 나는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부터 몸 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혹시, 나 코로나에 걸린 걸까?' 걱정했던 이전의 상태와는 확실히 달랐다. 한 여름이었지만 춥다고 지각했던 나는 두꺼운 이불을 두 겹이나 싸매고 점심이 될 때까지 현실과 꿈을 오갔다. 정신을 차리고 집에 있던 코로나 자가검진 키트로 검사를 했다. 콧구명 주변을 가볍게 문질렀음에도 결과는 확진이었다. 나는 급히 코로나 검사를 하는 병원을 찾아보았고, 전화로 방문 의사를 먼저 밝힌 뒤에 병원에서 알려주는 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았다.
오후 6시가 넘어 약을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약국에서부터 집까지 걸어오며 온갖 생각이 들었다. '3일 뒤에 자격증 면접이 있는데 이를 어떡하지?' '도대체 누구로부터 옮은 것일까?' '집으로 들어가면 이제 밖으로 못 나오겠지?' 하는 생각들은 밀려들던 아픔조차 잠시 잊게 했다. 그러다가 나는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 엄마와 아빠가 코로나에 걸렸을 때 나도 걸렸다면 어땠을까?' 부모님은 지난 7월 말에 코로나에 확진이 되었다. 그때는 내가 학생상담센터를 그만둔 지 1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아침에는 아빠가, 점심에는 엄마가 확진되는 경악스러운 상황에 처했었다. 아빠는 회사에 보고하고 쉬면 되었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손자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에 학원에서 집으로 가는 우준이와 서준이를 데리러 갈 사람이 없었다. 나는 엄마, 누나와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눈 끝에 누나네 집에 가서 며칠간 생활하기로 했다. 나는 다행히 부모님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적이 없었고, 코로나 검사 결과도 확인했으니, 당분간은 자가검진 키트로 꾸준히 결과를 확인하며 조카들을 돌보기로 했다.
코로나 확진의 위기를 벗어난 백수 삼촌은 조카들의 영어 학원 차량이 정차하는 곳에 나가 있었다. 급하게 싼 짐가방이 훈련병 시절에 처음 멘 군장처럼 불편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학원 이름이 적힌 봉고차가 이내 도착했다. 창문으로 내다보던 조카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커진 눈동자는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삼촌, 왜 왔어?" 조카들과 손을 잡고 걸으며 할머니를 대신해서 왔고, 며칠간 우준이, 서준이네 집에서 함께 지낼 거라고 하니, 무엇을 하며 놀아야 할지 생각하는 조카들의 모습을 보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부모님은 코로나에 확진되었고, 누나와 매형을 일을 하고 있었으니, 조카들을 챙겨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물론 아침저녁으로 누나와 매형이 조카들을 돌보겠지만, 나는 어울려 놀던 이전의 역할에서 벗어나 그들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상황들에서 조카들을 챙기고 보호해야 했다.
합숙 첫날 저녁, 누나는 나에게 내일의 일정을 들려주었다. 가만히 듣고 기억하려 했으나 조카들의 일정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았다. "학교에 갔다가.. 방과 후 교실이 끝나고..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다시 데리러.." 혼잣말을 하며 누나가 말하는 시간과 내용, 장소를 자세히 적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누나와 매형은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거실 소파에서 티비를 보던 우준이가 자다 깬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동생이 내심 못 미더웠던 누나는 조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메시지로 남겨 놓았다. 그 내용을 확인할 때에 서준이가 잠에서 깨어나 거실로 나왔다. 이날의 첫 단계는 등교시키기였다. 조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엄마가 옷을 입혀주는 것을 보아왔기에 당연히 누나가 골라 놓은 옷을 입혀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씻고 나온 사이에 조카들은 이미 옷을 입고 등교할 준비를 마쳤었다. 아침밥으로는 누나가 사두었던 삼각김밥을 데워 먹었고, 양치를 마친 뒤에 우리는 등굣길에 올랐다.
방과 후 교실이 끝나고 학원에 가는 길에서도 조카들이 성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준이와 서준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은 4층에 있었는데, 내가 처음 데려다주는 것을 알고서는 어디로 데리러 와야 하는지 직접 설명해주었다. 할머니는 평소에 건물 입구 옆에 있는 요구르트 할머니 곁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4층으로 와서 기다리겠다고 했고, 조카네 집으로 돌아갔다가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갔다. 그렇게 보냈던 며칠간의 기간 동안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어린 조카들의 '만약'을 대비하는 것밖에 없었다. 익숙하게 돌아가던 조카들의 삶이 안전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내게 필요한 역할이었다. 그 이상으로 내가 조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또한 조카들이 내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없었다.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면 역시 함께 노는 시간의 보장이었다.
부모님이 코로나에 완치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떠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었지만, 오랜만에 들르는 집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다시 일상에 점차 적응해나가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꿈에서 우준이가 나왔다. 우리는 가족 같았다. 한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형편이 빠듯한 듯했다. 그날은 우준이의 생일이었다. 나는 우준이의 생일 밥을 먹이려고 늦은 밤에 요리를 하고 있었다. 식탁에 쌓여가던 음식들은 대부분 라면으로 만든 것이었다. 음식을 다 만들고 식탁에 앉았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 "우준이는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겠다" 그 말은 들은 우준이는 자기는 이런 게 싫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우준이는 어떤 생일 파티를 원하는데?" 하고 묻자 우준이는 말했다. "친구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
그때 나는 미리 촬영해둔 영상을 우준이에게 보여주었다. 그 영상에서는 우준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같은 반 친구들이 나왔다. 그들은 한 명씩 "우준아, 지난번에 도와줘서 고마워", "우준아 지우개 빌려줘서 고마워"처럼 평소 우준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한 문장씩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영상에서는 내가 최근에 감동을 받았던 음악이 함께 흘러나왔다. '성도의 노래'라는 곡이었다. 화면에 한창 집중하고 있던 그때에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준이를 쳐다보니 그가 오열하고 있었다. 우준이가 흘리던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다는 마음이 들던 순간에 그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여전히 눈물을 쏟아내고 있던 내가 나타났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울고 있던 우준이가 나의 어린 모습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우준이와 서준이가 태어나고, 그들을 알아가고, 가까워지고, 때때로 실망했지만, 이내 풀리는 과정을 거치며 나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가 원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친구였다는 것을. 나는 그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는 가까워진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가까워진 사람들 중에서는 그 관계가 보다 깊어진 경우도 있고, 여러 사정으로 일찍이 마음에서 떠났거나 떠나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많은 관계를 통틀어서 나에게 '사랑'에 대해 올곧게 생각하도록 도운 친구들은 단연 조카들이다.
나는 그동안 사랑을 받고 싶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내가 받는 사랑이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았기에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을 듬뿍 나누어주는 순간을 고대하며 살았다. 나는 그동안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사랑을 수동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달리 정의해보고자 한다. 사랑의 토대는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받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지만, 주고 싶은 마음이 그보다 큰. 우준이와 서준이가 소박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견디기 어려운 우스꽝스러운 모습조차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이윽고 돌아오는 그들의 웃음소리에 또다시 살아갈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이런 게 사랑이 아닐까. 코로나에 걸려 자격증 면접에는 떨어졌지만, 만약 한 달 전에 부모님과 함께 코로나에 걸렸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따끼따기, 놀자"
"어.. 삼촌 공부해야 하는데"
"우리도 해야 하는데 이따 할 거야. 우선 놀고 하자"
"어... 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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