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지도 어느덧 3개월이 되었다. 세월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또다시 실감하게 된다. 11월이 다가오고 있다. <잊혀진 계절>의 시기가 성큼 다가왔다. 곧 있으면 장롱에 넣어둔 코트를 꺼내 입을 테다. 동네를 배회하며 붕어빵 파는 곳을 찾기도 하고, 두꺼운 이불을 준비하며 겨울을 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또 한 살을 먹고, 서른여섯의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서른여섯이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요즘 사람들에게 내 나이를 말할 때마다 깜짝 놀라고는 한다. '아니, 내가 벌써 서른다섯이라니?' 누군가는 나에게 여전히 젊다고 말할 테지만,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는 가삿말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썩 달갑지 만은 않다.
늘어가는 새치를 보며 한 친구가 "류이치 사카모토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검색해서 나오는 그의 사진들은 대부분 백발로 보이는데. 그 정도로 하얀가 싶어 거울을 연신 들여다보기도 했다. 요즘에는 허리가 쑤시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자리에 오래 앉아 있거나, 불편한 자세로 힘을 쓰고 나면 어김없이 통증이 찾아왔다. 또한 예전과는 다르게 조금만 걸어도 무릎이 시큰한 것 같고, 눈은 더욱 침침해져서 날이 갈수록 거북목이 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나이는 들어가고, 하는 일은 없으니 다가오는 내일을 두려워하며 마지못해 오늘을 살아야 했다. 그간의 나라면 분명 우울에 절여진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테다. "누구는 월급으로 얼마를 받는데" "누구는 이번에 서울에 있는 집 샀다더라" "누구가 새로 산 차 얘기 들었어?" "이번에 걔 누구랑 결혼한대"처럼 나보다 괜찮은 조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부러워하며 더욱 웅크리고 지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외부로 시선을 잘 두지 않는다. 내가 관심을 두고 싶어 하는 것들은 나의 내면에 있다. 일상에서 나는 어떠한 감정들을 느꼈고, 그러한 감정들이 내게 의미하는 것과 나에게 더욱 친절한 삶을 위해 그 감정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이 커다란 흥미로 다가온다. 하고 싶은 일이 없는 서른다섯의 백수는 적어도 그간의 나에게 있어서는 절망적인 상황이 틀림없었겠지만, 이제는 또 언제 요즘처럼 쉬어보겠냐며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보려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를 내 마음대로 보내는 데 별다른 불편감이 들지 않는다. 이와 같은 평온한 상태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우울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데에는 나를 생각해주는 누군가들의 힘이 컸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너는 분명 잘 될 거야' 하는 믿음을 자주 주었다. 한번씩 안부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같았다. "수호샘은 잘 될 거라 믿어요" 또한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내가 떠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비슷한 말을 해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부쩍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경우도 늘어났고, 먼저 연락을 받는 경우도 늘어났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나 스스로의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고, 후자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이 관계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신중함'이 나의 성격을 대표하는 특징이었다면 요즘은 '진실함'이 대표를 꿰찼을 것이다. 물론 혼자 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사람들과 있을 때에도 편안함을 곧잘 느낀다. 이것이 서른여섯을 앞둔 나의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관계에서도 보다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변화한 데에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나를 따스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대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중에서도 조카들과의 관계가 나에게는 소중했고, 소중하다. 나는 그동안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면 일종의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해야 보상처럼 사랑이 따라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조카들은 달랐다. 물론 맞춰줄수록 좋아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꼭 맞춰주지 않아도, 때때로 갈등을 경험하더라도 우리의 관계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와 관계하는 사람이 그저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순수한 형태의 사랑 또한 있다는 것을.
내가 서른여섯 살이 되면 조카들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된다. 문득 나이를 계산해보니 스물일곱이나 차이가 난다. 반대로 조카들의 나이가 서른여섯이 되면 나는 예순셋이 된다. 꼼짝없이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그때가 되면 사진 속의 류이치 사카모토처럼 완벽한 백발이 되지는 않을까. 허리는 얼마나 더 불편해질까. 무릎은 괜찮을까. 돋보기 안경은 필수겠지. 한창 성장하고 있는 조카들이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 고민들이 늘어간다.
나이가 들어가는 일이 싫으면서도 기대되는 부분도 있다. 조카들과 앞으로 어떤 추억들을 쌓아가게 될까. 조카들과는 해보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다. 함께 박물관에도 가보고 싶고, 맛집도 다녀보고 싶고, 등산도 해보고 싶고, 공도 같이 차보고 싶다. 더 기회가 된다면 어딘가로 여행을 함께 떠나보고 싶다. 물론, 조카들이 그때에도 나와 놀아준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초등학생이 된 조카들은 어느덧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조카들의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 '척도 질문'을 자주 사용한다. "만약 우준이, 서준이가 가장 좋아하는 정도가 5점이고, 싫어하는 정도가 1점이라면 이건 몇 점이야?"처럼 어느 정도로 그 대상을 좋아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상담 기법이다. 한 번은 우준이가 나에게 "삼촌이랑 노는 게 5점이라면 친구들과 노는 것도 5점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조카들의 발달 단계에서는 특히 또래 관계가 중요한 만큼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도 나는 조카들과 놀았다. 게임도 하고, 포켓몬스터 놀이도 하고, 보드게임도 했다. 저녁도 같이 먹었고, 삼촌 코에는 코딱지가 많다는 놀림도 받았다. 비록 나와 조카들이 나이차가 꽤 나기는 하지만, 나는 앞으로 이어질 우리의 관계를 상상하며 평생을 친구처럼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어른이라기에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고, 그들을 그저 어린이라고 하기에는 우울했던 내 마음을 꾸밈없이 어루만져주었으니까. 나에게 있어 우준이와 서준이는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을 알려준 특별한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