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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Nov 28. 2022

글쓰기는 또한 누군가를 향한 진실한 마음

글쓰기는 습관 들이기 어려운 활동 중에 하나예요. 기본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혼자가 되어야 해요. 집중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자연스레 웨이브, 넷플릭스, 유튜브 영상을 보는 시간과는 거리를 두어야 해요. 자극적이라고 느껴지는 활동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요. 현실 감각을 잊게 하고, 다만 그 활동에 몰두하도록 도와요. 반면에 글쓰기는, 특히 에세이라고 불리는 장르는 '나'에게 온전히 몰두해야 해요. 에세이에서는 '나'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를 샅샅이 살펴보아야 하거든요. 


위에 예시로 든 웨이브, 넷플릭스, 유튜브 영상은 모두 외부 자극이에요. 반면 에세이는 외부 자극을 내부에서 처리하고 난 뒤의 결과에 가까워요. 그러니까 영상을 볼 때가 단순히 감각을 활용하여 그에 동하는 수준이라면, 에세이는 동하는 일련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자연스레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영상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그 영상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 영상을 보며 무엇을 깨달았는지 같은 무수한 질문들과 그에 대해 대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해요. 


단순히 무언가를 적어야 하는 것조차 쉽지 않고, 부담되는 게 사실이지만, 글의 주제가 '나'가 된다는 실정은 글쓰기를 기피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해요. 물론 단순히 '나'가 되는 건 아니에요. '나' 자체라기보다는 '나'가 경험한 친구, 직장, 학교, 가족, 영화, 책처럼 어떤 대상이나 환경, 작품 등이 에세이의 소재가 돼요. 그렇다 보니 때로는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글을 전체적으로 이끌어갈 때도 있어요.


저는 한 때 '그대를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브런치 매거진에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그곳에 올렸던 첫 글은 퇴사하고 두 번째 입사를 준비하는 후배를 생각하며 적었었어요. 말로는 직접 전하기 어려웠던 마음의 언어를 글로 적으니 한결 수월했어요. 언제든 퇴고할 수 있고, 내키지 않으면 삭제해도 그만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제 마음을 보다 정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그 후배가 제 글을 보았을지는 여전히 몰라요. 봐달라고 얘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나'에게 초점을 두고 글을 쓸 때보다 정성스럽게 다듬어가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사람들의 반응 정도와는 관계없이 그 과정 자체가 저는 만족스러웠어요. 뿌듯하기도 했고요. 그 이후로도 술에 취해 길을 걷는 누군가, 포장한 피자를 들고 가는 누군가, 동료, 친구, 가족, 조카처럼 제가 만났거나 알고 있는, 그러니까 제가 경험한 '누군가'는 '그대를 생각하는 시간'에서 저와 함께 주인공이 되어주었지요.


제가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인 <거시기 머시기>의 4장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시의 정체성과 소통'이라는 주제로 여러 시인들이 대담을 나누는데, 그중 김언 시인은 시는 몇 안 되는 애인을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고 말을 해요. 그리고 그의 말에 대해 강정 시인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만 마음을 얻기 위한 작업인 것 같다고 언급해요. 저는 물론 글쓰기 중에서도 에세이에 대해 얘기하고 있고, 시는 다른 분야이기도 하고, 위의 내용은 대담의 일부라 그 자체로 받아들이긴 어렵겠지만, 제가 '그대를 생각하는 시간'을 쓰던 그때가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제 글을 읽어줄 누군가를 크게 상상하지 않았어요. '누가 내 글을 읽어줄까?'와 같은 생각은 저에게 사치였으니까요. 이때는 글에서 '나'가 먼저고, 읽어 줄 누군가는 나중이었던 것 같아요. 마음에 해소되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많아서, 그로 인한 상처들이 자꾸 떠올라서 어디에든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됐었거든요. 그랬기에 초반에는 하고 싶은 말을 격식 없이 쓰는데 열중했어요. 그러면서 제 감정들을 한참 토해냈고,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을 받게 되자, 제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 이후로는 저 또한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들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 전하고 싶은 말은 때때로 제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되어주었지요. 


놀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괴로운 마음이 커져도, 숨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도 기어코 자리에 앉아 혼자 글을 쓸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읽어 줄 누군가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소중한 사람들과 마음을 얻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들과 더욱 가까워지는 상상을 하며, 꾸준히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기대를 담아 끝내 써 내려갈 수 있었으니까요.      


참고: 이어령(2022). 거시기 머시기. 김영사. pp 100. 


Image by Jackson David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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