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산에 가던 주말 아침이었다. 북한산에 오르기 위해 버스에 타고 있었고, 버스 안에는 우리의 같은 목적의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일찍이 버스에 탄 덕에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버스로는 아빠가 먼저 들어왔기에 아빠가 창가 쪽, 내가 통로 쪽에 앉아 있었다.
등산코스를 지나치는 노선의 버스를 주말 아침에 탄다는 건 대단히 모험적인 일이다. 특히 산에 오를 계획이 없다면 말이다. 물론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한 교통수단이 등산로를 경유하는 버스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다른 수단이 있다면 기꺼이 선택할 것을 권하고 싶다. 사람이 많은 것은 둘째 치더라도 등산객들이 지닌 두툼한 백팩이 우리의 몸을 사정없이 밀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날도 그랬다. 어떤 아저씨가 내 옆에 섰다. 한쪽 귀로 음악을 듣던 나는 누가 옆으로 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존재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그가 멘 백팩이 나를 밀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그는 내 왼편에 있던 얇은 기둥에 몸을 기댔다. 다리도 앞으로 제법 뺀 듯했다. 하지만 가방의 널찍한 면적을 오이 만한 기둥이 모두 감당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그는 기둥에 오직 몸만 맡긴 듯했고, 그 옆으로 튀어나온 묵직한 느낌의 가방이 나에 대한 공격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등산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목적지에 오르거나, 내려오다가 괜찮아 보이는 곳에 걸터앉아 숨을 크게 내쉬는 맛으로 산을 찾는다. 그럴 때면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숨이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몸을 통해 마음까지 전해지는 자연의 포근함은 평일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영양분이 되어준다. 하지만 모처럼 버스를 타고 뒷산보다 높은 북한산에 오르려던 나의 달콤한 계획에 '누군가의 백팩'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아저씨의 가방은 몇 정거장이 지나도 나를 계속 밀쳤다. 나는 출근할 때마다 만원 지하철에 탄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어깨에 치이는 것은 그다지 기분 나쁜 일이 아니다. 서로가 불편을 감수하고 저마다의 직장으로 향하기 때문에 간혹 어깨빵을 당하는 일은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 생각하며 이내 잊는다. 그러나 아저씨의 백팩은 앞으로 멨다면 내가 불편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아저씨가 무리하게 기둥에 기대지 않았다면 나는 즐겁게 음악을 들으며 북한산 입구에 도착했을 것이다.
백팩이 나로 하여금 주는 불쾌감과 그로 인한 짜증이 느껴질수록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백팩을 뒤로 메고 기둥에 기대야만 하는 아저씨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백팩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나는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거나, 어깨를 평소보다 더욱 피려고 노력했다. 어깨를 굽히고 상체를 오른쪽으로 기울여야만 하는 상황이 그저 싫었다. 나를 밀치는 백팩이라는 존재에 집중할수록 짜증은 더욱 깊어져갔다. 심지어는 '북한산에 괜히 가는 건 아닐까?' 혹은 '이 자리에 괜히 앉았다'와 같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기도 했다.
'이대로 내면의 감정에 지배당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나는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몇 차례 심호흡을 반복한 뒤에 신체 감각을 느끼기 위해 차분하게 주의를 기울였는데 왼쪽 어깨가 유독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왼쪽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구나' 생각하며, 긴장을 풀어주기 전에 '괜찮다'는 부드러운 에너지를 어깨 주변으로 보내주었다. 최근 명상 수업에서 소감을 발표할 때, 그리고 자신의 말만 급하게 쏟아내던 상사로 인해 느꼈던 긴장감과 그에 관한 생각들이 침투적으로 생겨날 때도 코끝 감각에 집중하며 현재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다.
어깨의 긴장을 알아차리고, 느끼고, '괜찮다'는 미소를 건네며 힘을 풀어주는 행동을 반복하자 백팩과 아저씨, 나의 감정과 '나'가 구분되기 시작했다. 뾰족한 것은 오직 아저씨의 백팩이었다. 그 백팩으로 인해 내 마음까지 뾰족해질 이유는 없었다. 등산 가방을 멘 아저씨는 기둥에 기대고 싶었을 뿐이고, 내 어깨가 불편할 거라는 생각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저씨는 그저 자신이 기둥에 완벽하게 기댔을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백팩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뻣뻣하게 견딜수록 불쾌감만 늘어났다. 하지만 나의 신체 감각과 마음을 알아차리고 자세는 그대로 하되 어깨에 힘을 빼자 아저씨의 미는 힘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 힘이 나를 짜증 나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기대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짜증이 난 마음을 알아차리고 어깨의 긴장을 풀어주자 백팩과 굳이 힘겨루기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백팩에게 밀리지 않을 적당한 힘만 유지하면서 다시 음악과 풍경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타라 브랙이 쓴 <자기 돌봄>에서는 한 사람과 그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바다는 파도를 일으키지만 파도를 바다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라는 온전한 존재를 '바다'라고 볼 때 시시각각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감정의 파도는 '나'가 아니다. 파도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고, 그 파도를 인식할 때 '나'는 고요한 바다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파도는 분명 바다의 일부이지만, 파도가 바다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 자체로 옳지만, 그러한 감정이 우리의 존재 자체는 아니다. 버스에서 느꼈던 불쾌감과 짜증은 그 순간뿐만 아니라 삶 곳곳에서 느껴질 때마다 옳았다. 이러한 감정들이 느껴지는 이유에는 저마다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이 '나'라는 바다를 뒤흔들 권리는 없다. 불쾌감과 짜증을 차분히 인식하고, 가만히 바라보고, 친절하게 살펴보았던 버스에서의 경험은 타라 브랙이 <자기 돌봄>에서 설명한 'RAIN 수행법'과 비슷하다. 여기에 더해 타라 브랙은 자신과 감정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Non-identification, RAIN 수행법의 'N')에 대해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들며 설명한다.
나는 그날 등산을 마치고, 해장국을 한 그릇 먹은 뒤에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잤다. 산 중턱에서는 콧바람을 쐬기도 하고, 내려와 마신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행복의 맛'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길에는 꾸벅꾸벅 졸며 피곤함을 느끼기도 했고, 등산을 하던 중간중간에 반복되던 덥고 추운 느낌에 불편하기도 했다. 그날 하루, 눈앞의 상황들은 시시각각 변했고, 그때의 내 마음도 수시로 달라졌다. 하지만 나는 온전할 수 있었다. 나의 두 눈에 감정이라는 색안경이 씌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 나는 마음에게 물었다. 마음이 무어라 대답하면, 다정한 말들을 건네며 나는 그를 따스하게 맞았다. 나는 자유로웠고, 나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단단했다.
참고: 타라브랙(2018) 자기 돌봄(이재석 옮김, 김선경 엮음). 서울:생각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