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에 속초 가는 거 어때?" 공휴일을 앞두고 현수는 말했다. 그가 내게 연락한 시간은 오후 2시였다. 당연하게도 회사에서 한창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한 기관에서 상담사로 근무하고 있다. 전화 응대를 하는 일이 나의 주된 업무이다. '따르릉' 하며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와 그 외의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나의 예민성은 자연스레 발휘된다. 신경이 곤두서지 않으면 저마다의 사연을 말하는 내담자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내부 규정을 한편으로 감안하며 통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라도 전화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고, 사람들의 개별적인 요구사항들은 섬세하게 정리할 수 있으며, 주어진 일들을 기한에 맞춰 제각기 처리할 수 있도록 몰입한 나를 과각성 상태에 빠져있다고 표현한다. 졸음을 깨기 위해, 더욱 집중하기 위해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는 것처럼, 회사에서의 나는 각성 상태에 취해있다. 평소의 나는 숙고하는 성격이다. 한 가지의 일이라도, 만약 그게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이라면 사람, 거리, 가격, 맛, 분위기 같은 여러 가지 선택사항들을 꼼꼼하게 따져본다. 그러다가 결국 간단하고 손에 가까운 음식을 대부분 선택하는 게 흠이지만.
아무튼 회사에서의 나는 숙고하는 성격을 바탕으로 일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다음, 다음'을 마음속으로 외친다. 일을 마냥 빠르게 처리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꼼꼼함을 제법 유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내게 기대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더 빠르게'가 아닌가 싶다.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을 파악하기 위해 매뉴얼을 볼라치면 걸려오는 전화에, 발생하는 상황에 몸과 마음에 비상이 걸린다. 입사 4개월 차, 정직원이 된 나는 이제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업무와 소화해야 할 역할이 나와 맞지 않다는 데에 확신이 생겼다.
나는 속초에 가자는 친구의 메시지를 읽고 "헐... 속초?"라는 답장을 보냈다. '만약 내가 속초에 가겠다고 결심한다면?' 만나는 시간을 대략 저녁 8시로 정한다고 해도 집에 들러 옷이나 세면도구를 챙기기에는 빠듯했다. 그렇다고 여행에 필요한 짐을 안 챙겨갈 수는 없고. 더 늦게 출발하기에는 공휴일 다음 날이 목요일이라 짧은 여행이 무의미할 것 같고. 속초에 다녀온 다음 날 바로 출근을 해야 하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막힌다면? 밤늦게 집에 도착한다면? 벌써 피곤한데 속초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잠만 잔다면? 속초에 가자는 친구의 물음에 놀라는 대답만 했을 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1박 2일의 속초 여행에서 실망하거나 후회할 수 있는 구석만 나는 기민하게 찾아냈다.
손끝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져있던 나는 한편으로 속초에 가자는 친구의 말도 하나의 일처럼 느껴졌다.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 서둘러 대답하고 마쳐야 하는 일. 뻗어가던 나의 생각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속초에는 가지 않는 게 옳았다. 속초에 간다는 것은 내게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좋은 컨디션으로, 싱싱한 회와 바삭한 새우튀김을 양껏 먹고, 혼자서 밤바다를 구경할 여유와 공휴일날 오후 일찍 집에 도착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속초에 가지 못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예상만큼 즐겁지 않을 거란 생각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즉흥적으로 여행을 다녀왔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당일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아무런 준비 없어 서울을 벗어나 본 경험은 아무래도 없었다.
"여행 작가가 될 거예요" 퇴사하고 나면 뭐 할 거냐는 상사의 말에 나는 대답했었다. 그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지 말고 주말을 이용해서 여행을 다녀보고, 글을 써본 뒤에 퇴사를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당시 나를 그만두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해 꺼낸 말로 받아들였다. 그도 오래 다녔으면 하는 의도로 말했을 테다. 돌이켜보면 그의 말이 옳았다. 내게는 언제든 떠날 기회가 있었다. 자유가 있었다. 당일이라도, 주말 동안이라도, 최근에 회사를 그만두고 맞았던 4개월 동안의 휴식기에도 나는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다닐 수 있었다. 또한 회사에 다니면서도 내가 여행 작가라는 직업이 맞을지 시험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은 건 나였다. 현실에 절절이 얽매인 채로 나의 여행이 기대와 같이 않을까 봐, 후회할까 봐 걱정하며 웅크리기를 반복했었으니까.
두터운 패딩잠바와 청바지, 누나가 결혼할 때 사준 13년 된 검은색 니트와 때가 묻어가던 범고래 신발, 서류가방이 이번 여행에서 챙길 수 있는 짐의 전부였다. 비록 1박 2일이라 할지라도,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다닐 게 뻔하고, 어쩌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수 있고, 차가 막힐 수 있고, 숙소도 아직 예약하지 않았고. 여행의 모든 일정이 의문투성이고, 꺼림칙하면서도 어쩐지 일을 우선 저지르고 싶다는 충동이 샘솟았다.
"수호샘 자리에는 왜 이렇게 먼지가 많아요?" 청소 당번이던 한 동료는 언젠가 말했다. 그는 내 주변에서 딸려 나오던 먼지 뭉치들을 가리켰다. 그 뭉치들은 분명 나만의 몫은 아니었다. 내 전임자 또한 자신의 자리를 정리할 여유가 없었기에 탁구공 만한 먼지들을 내게 물려주었을 것이다. 밀려 나온 한 움큼의 때를 들킨 것처럼 민망해하면서도 나는 키보드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모니터 위로 솜털처럼 내려앉은 먼지, 헝클어진 수납장, 서류로 뒤덮인 책상,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넸는지 기억나지 않는 동료들과의 사이가 나의 최근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의 매일이, 기계가 작동하듯 유기적으로 흘러가며 반복과 안정을 추구하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가 점차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확신은 들지 않았다. '속초에 갈까, 말까?' 하는 고민을 동료에게 털어놓았다. 동료는 안 해 본 일인데 해보고 싶고, 그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일만 아니라면,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의 말에 머리가 박하사탕이라도 먹은 것처럼 환해지는 게 느껴졌다. 듣고 싶었던 말은 그가 들려준 듯싶었다.
"에이, 네가 망설이는 동안 좋은 숙소 예약 다 찼잖아" 현수는 투덜거렸다. 내가 속초에 가겠다고 대답한 시간은 오후 4시. 그가 처음 제안한 때로부터 2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때부터 그와 나는 부랴부랴 어디서 만날지, 무엇을 준비할지에 대해 나누었다. 오후 6시 20분, 칼퇴근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에 가깝게 퇴근하기 위해 마무리짓지 못한 일과 혼란스러운 마음을 책상 위에 고스란히 남겨둔 채, 천호역으로 출발했다.
Image by Ag Ku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