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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Mar 12. 2023

무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베란다에 앉아 하늘을 가만히 바라본다. 컴컴한 하늘에는 옅은 구름과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모를 점 하나가 깜빡인다. 오래된 아파트 복도에는 불이 켜지기도 꺼지기도 했다. 창문에는 비스듬히 고개를 든 검은 얼굴이 하나 보인다. 표정 없는 얼굴에는 다만 내부순환로나 형광등, 아파트 단지들이 즐비해있다.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곤 한다. 그곳에 현실은 없다. 꿈이 가득하다. 나는 나의 일상을 마음껏 꾸며낼 수 있는 무대로 하늘을 선택했다. 마음먹은 대로, 내키는 대로 그려낼 수 있었다. 살다 보니 정면을 쳐다봐야 하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나는 눈앞의 일들을 보는 게 두려워서 줄곧 턱을 내보였다. 


한 때는 땅만 보며 살아갈 때가 있었다. 첫 직장에 다닐 때였다. 나는 그때의 경험으로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시절까지의 나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어리다는 덕택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등록했던 영어학원에 출석하지 않아도, 취업 준비를 애타게 하지 않아도 내게는 정해진 다음이 있을 것 같았고, 내가 외면했던 모든 것들이 용서될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책임을 감당하며 선택해야 하는 순간, 그 순간마다 나는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그럴수록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은 줄어들었고 나는 거리를 배회했다. 길은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그런 허전한 품이라도 좋았다. 땅을 보며, 굴러다니는 전단지나 들러붙은 껌딱지를 보며 안타까워하기도 했고, 고개를 들기가 무서워 조용한 길을 찾아다녔다.


남산 도서관, 경의선 숲길, 홍제천, 이촌한강공원처럼 내가 걷던 곳은 번화가에 비해 대체로 으슥했고 한적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나의 숨소리가 그득해지는 길과 골목으로 찾아들어갔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사라지는 길을 걷다가도 시끌벅적한 길로 이내 접어들었다. 숙대입구, 서강대, 포방터시장, 이촌역처럼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그곳에서 고기 굽는 냄새, 술잔을 부딪치는 모습, 웃음소리, 살갗에 내려앉는 외로움과 만났다. 도망치고 싶어 하면서도 누군가와 손을 잡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2023년이 되었다. 처음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때가 2013년이었으니 10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내가 고민하는 것은 같다. 나는 여전히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지각할 때마다 호흡이 가쁘다는 것을 느낀다. 정면을 응시하면, 우리 동네를 지긋이 바라보면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하늘을 보며 내일을 상상하거나, 땅바닥을 쳐다보며 어제에 두고 온 것을 떠올린다. 


다시금 정면을 본다. 표정은 없다. 등 뒤에 있는 형광등에 반사되어 나의 형태는 보이지만, 얼굴은 투명하다. 기분은 자기 스스로 선택하는 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인즉슨, 내가 지금 불안해하고 우울해하는 데에는 나의 몫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습관처럼 내가 불안해하고 우울해할 만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나의 오늘이, 이 순간이 보다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해야 오늘을 특별하게 보냈다고 생각할까?' 물어보면 나는 마땅히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다만 '해야 한다'는 주문을 외칠 뿐이다. 사실, 해야 할 일들은 많다. 방도 정리해야 하고, 논문도 수정해야 하고, 이사할 곳을 찾아보거나, 그 외에 현재의 내게 필요한 일들을 순서대로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내게 꼭 필요한 활동들은 하지 않고, 그저 내일이 오는 것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유튜브나 드라마를 보며 현실을 잊는 것이 필요한 선택이라고 애써 생각한다. 서른여섯이 된 내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들을 회피하며, 가만히 앉아 다만 조급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은 분명 불안과 우울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는 오래된 방식이다.


이제는 정면을 보는 습관을 길러야겠다고 다짐했다. 행복은 전적으로 하늘이나 땅에 있지 않다. 그 중간인, 균형감 있는 삶과 현실에 있다. 정리하지 않는 방과 고치지 않는 논문, 검색하지 않는 전세는 결국은 나의 책임이자, 나아지지 않는 불안과 우울의 구덩이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꼴인 셈이다. 


여전히 나의 고개는 삐딱하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턱을 당김으로써 직면한다. 아프지만, 많이 아프지만 하늘에는 내가 살아가는 치열한 일상에 필요한 것들이 별로 없다. 때때로 위로는 받을 수 있겠지만 하늘은 내게 도움의 손길을, 기적 같은 변화를 내밀지 않는다. 도망칠수록, 하늘과 땅만 지독하게 바라볼수록 상상과 후회를 거듭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도와달라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게 필요한 일들을 먼저 하지 않는 이상, 삶은 바뀌지 않는다. 불안하고 우울한 삶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는, 불안해하기와 우울해하기를 가만히 선택하기보다는 한 가지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 의자에 쌓인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든가, 논문을 한 글자라도 수정한다든가, 모은 돈이 얼마인지 정리해 본다든가 하는.


그래도 지금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볼까 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이 순간을 차분히 느끼고 싶다. 나는 또한 습관을 고쳐야 한다고 스스로를 재촉하기보다는 더 이상 불안과 우울에게 수동적인 존재로 살고 싶지 않다고 결심한 나를 더욱 알아주고 싶다. 이처럼 나이답지 않게 연약한 나라도, 억압되어 왔던 남성성을 최근 만나게 된 '나'이지만, 이러한 나조차 이제 나는 사랑하고 싶다.   


Image by tookapic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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