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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Mar 26. 2023

사랑하고 싶다. 그때 그때처럼.

가끔 책상을 정리하지 않고 퇴근한다. 약속 때문이다. 정리라고 해봐야 고작 책상 위의 서류들을 가지런히 쌓아두는 정도이지만, 소중한 이들과의 만남은 내게 깔끔해 보이고 싶다는 욕구보다 우선이다. 경복궁역을 빠져나와 한참을 달려간 끝에 약속한 장소가 보였다. 그곳에는 직장 상사와 후배가 앉아 있었다. '이 둘은 함께 근무하던 시절에 크게 교류가 없었는데.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까?' 생각하며 그들이 건네는 앞접시와 포크를 받았다. 


"아이고, 얼굴이 많이 야윈 것 같은데?" 얼굴에 대한 얘기를 어김없이 들었다. 친구들로부터 얼굴이 삭았다는 말을 최근에 들었다. 꽤나 직접적인 표현이라 "그래?" 반색을 하며 카메라에 비치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한 친구는 실제 얼굴은 카메라에 드러난 것과 다르다며, 삭은 얼굴을 표현하기 위해 역으로 보정(?)을 해주었다. 기미를 넣고, 안색도 바꾸며 실제에 가깝게 바뀐 얼굴에는 시름이 씌워져 있었다.


치킨 한 조각 입에 넣기도 전에 그간 얼마나 힘들었지는를 상사와 후배에게 토로했다. 내 얘기는 비록 사그라드는 맥주잔의 거품처럼 이내 끝났지만,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얼굴이 야위고 삭을 만큼 괴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몸과 마음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 얼굴은 아무래도 '구조를 갈망하는 마음의 간절한 외침이 아닐까?' 생각했다.


업무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상사의 얘기, 취업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 후배의 얘기가 뒤따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잠자코 듣던 나는 그들의 말이 끊길 때에 자꾸 옛날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상사는 상담을 전공한 사람답게 "주로 어떤 옛날 생각을 자주 하는데요?"하고 물었다. 나는 좋았던 추억들이 주로 떠오른다고 대답했다. 상상하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그런 순간들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른다고.


출근하는 때에, 근무하던 중에, 퇴근할 때에, 가만히 음악을 듣고 있을 때처럼 추억은 상황을 가리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대부분 실컷 상상한 후에 '또다시 추억 여행에 빠졌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첫 직장 입사 동기들과 어느 주막에서 함께 들었던 이정봉의 '어떤가요'. 마찬가지로 첫 직장에서 금요일 퇴근 후에 동기, 후배들과 만나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부대찌개를 먹었던 합정의 밤. 남산으로 오르는 버스에서 활짝 핀 벚꽃을 순수하게 올려다보던 여자친구와의 봄은 유독 자주 떠오르는 순간들이다.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는 이유가 클 테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현실이 크게 체감될수록 좋았던 때가 의식을 장악했다. 떠올리려고 억지로 시도하거나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마다의 추억 속에 빠져 들었다. 힘들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의 일이, 관계가, 환경이 미치도록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에 마음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아름다웠던 시절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불쑥 떠오르는, 돌아가고 싶다고 느끼는, 이내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의 공통점에는 '사랑'이 있다. 위의 세 가지 상황을 경험했던 당시의 삶은 꽤 만족스러웠다. 나는 함께 했던 이들을 사랑했고, 그들은 또한 나를 사랑했다. 비록 돌아보는 내게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은 후회스럽지만, 그때에는 오직 순간만 있었다. 과제에 대한 걱정이나 회사 생활, 미래에 대한 고민은 없었고, 다만 너와 내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조건도, 자격도 필요치 않았다. 따져볼 것이 없었다. 불완전했지만, 완전해지려 애쓰지 않았다. 서투른 모습 그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사랑이 필요했다.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도 마주 보며 견딜 수 있는, 엉킬 대로 엉킨 삶을 요목조목 만져보며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간절했다. 마음은 아무래도 그러한 시간을 사랑이 싹트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랬기에 나의 사랑이 무럭무럭 자라나던 때를 보여주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이 아닐까. 


사랑하고 싶다. 다시 그때처럼. 내일을 잊고, 어제는 내버려 둔 채, 어떠한 판단도 이루어지지 않는, 오로지 순간을 위해 숨 쉬게 하는.     


Image by Beth Thoma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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