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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pr 05. 2023

다음번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만났으면 좋겠어요

"어, 왔어요~" 남성스러운 외모와 달리 부드러운 콧소리가 들린다. 그의 인사는 '번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경직되었던 나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메뉴는 이미 시켜놓았다며 우렁차면서도 물결치는 듯한 그 목소리로 카스 한 병을 주문한다. 우리는 베트남 여행에서 가까워진 사이다. 장애인복지관에 근무할 당시 종사자들의 복지를 위한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그곳에서 만난 병석 선생님, 마음으로는 형이라고 부르는 그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나이를 크게 의식하는 편이 아니기에, 형이 나보다 몇 살 많은 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형은 또래에 비해 생각이 깨어있는 편이다. 복지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발전적인 방향을 고민하고, 꾸준히 결실을 맺어가는 형을 보면 때때로 이상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성격도 활달하고,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일도 잘하는 형을 보면 닮고 싶다는 마음 또한 절로 생긴다.


"이번에 몇몇 이용인들이 새로운 곳에 취업하게 되었어요" 새로운 성과가 있었다고 형은 얘기했다. 오늘 있었던 따끈따끈한 소식이라고도 했다. 형이 몇 년간 해오던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성과를 이루어낸 거라고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형은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다. 베트남 여행 당시 우리는 같은 방을 썼다. 그 여행에서 남자는 네 명이었고 숙소는 두 개뿐이어서 묵찌로 방을 함께 쓸 사람을 정했다. 우리는 운이 좋게도(?) 같은 방을 쓰게 되었고, 매일 밤 각자의 침대에 누워 아침에 가깝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에서 나는 반응했고, 형은 자신의 청사진을 들려주었다.


벌써 5년도 더 된 여행지에서 형이 얘기했던 상상들이 현실로 바뀌어가고 있는 게 들을수록 신기했다. 이따금 만날 때면 형은 이루어낸 무언가에 대해 얘기했다. 그때마다 나는 또한 감탄했고, 형은 이루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을 들려주었다. 이날의 대화도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2차로 간 호프집에서 취기가 오른 형은 관리자에게 보고할 때보다 내게 더 정성스럽게 말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형의 말을 듣고 보니, 나와의 만남이 어쩌면 그간의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말했다. 베트남에서부터 말해온 게 있으니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 같다고. 나는 그동안 형이 말하는 성과를 알아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주어진 환경에 단순히 적응하거나 회사의 지시를 따르는 게 편한 나로서는, 도전과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외로운 일일지 그저 상상만 해왔다. 내게는 그저 철인 같았던 형의 지친 기색을 보니 회사 내외로, 마음 안팎으로 분주했을 시간을 알아주고 싶었다.


"그동안 우리가 형의 상상과 성과를 중심으로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아요. 다음번에 만날 때는 어떠한 성과 없이,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만났으면 좋겠어요." 형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또한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과는 아무래도 좋으니 잠시 안주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듯한 형의 반응을 살피며, 우리가 마음에 만날 때는 빈 손으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나는 말했다.


형은 업무가 등산과 비슷하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산의 초입에서는 앞도 잘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게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나 능선을 타기 시작하면 목적지가 뚜렷해지기 때문에 체력은 줄어도 산에 오르기 수월하다고 했다. 형은 비록 베트남에서 자신의 일이 상상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었지만, 어쩌면 '능선에 다다른 형이 허리를 펴고 정상을 바라보던 순간을 내가 함께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봐요~" 손을 흔들며 인사하던 형에게서 콧소리가 들려왔다. 처음과 끝에, 그러니까 만날 때와 헤어질 때에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반갑고, 반가웠다는 마음을 전할 때 콧소리가 나오는구나' 싶었다.


문득 '형과 나는 등산 메이트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와 함께 한 시간이 형에게는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고, 정상을 올려다보게 하는 '휴식'의 의미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나도 언젠가는 나의 산에 형을 초대해서 능선에 오르는 험준한 과정을 보여주게 되지는 않을까. 어쩌면 형과 함께하는, 야채곱창에 맥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켜는 이 시간이 그동안 내게 후들거리는 다리와 거친 호흡을 알아주고 고르게 하는 산중 휴식이 되어준 건 아니었을까.


Image by Tumisu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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