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나만의 경청 방법
나에겐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숨은 능력이 있다. 슈퍼맨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은 구한다거나, 배트맨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당들을 소탕하는 등의 뛰어난 능력은 아니다. 어쩌면 정말 당연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반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능력이라기엔 부족할 수도 있다. 글을 쓰기 위해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 것만 같은 찝찝한 마음에 꽤 오랜 시간 뜸을 들였는데,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대화, 그 안에 경청하는 방법이다.
대화란 무엇일까? 사전에 의하면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대화가 시작되는 도입 부분을 생각해보자. 내가 어떤 주제, 예를 들어 "이번에 개봉한 그 영화 봤어?"라고 말했다면 상대방은 그 영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답하게 된다. 보통은 이렇지만 축구스타 리오넬 메시가 드리블하듯 이 곳, 저 곳 자유자재로 주제를 옮겨가는 사람도 종종 있다. 아마 악의는 없을 테니 선한 눈빛으로 바라봐주길 바란다. 아무튼 대화는 나와 다른 누군가가 서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듣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물론, 꼭 말로만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비언어적인 의사표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양한다. 말보다 더 많은 생각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드러내지 않을까 싶다. 다만, 한 번쯤 짚고 넘아가야 되는 부분이 있다. 어쩌면 표정, 자세, 억양만으로 상대방의 현재 상태를 판단하는 건 옳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오차범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화가 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많은 단어들이 있지만 찡그리다로 설명해보겠다. '찡그리다'가 바로 '화가 났다'로 받아들여지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상대방이 찡그리는 이유가 배탈이 났는데 나의 이야기를 듣다가 화장실을 갈 타이밍을 놓쳐서인지, 평소 습관적으로 찡그리는 편인 건지 또는 과거에 어떤 기억이 떠올라서 짓는 표정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여지도 있는 개인의 해석에 불과하다.
다시 본 주제로 넘어와서,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사람이 대화도 잘 이끌어 갈 것 같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화의 근간은 '듣기'에 있다.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방이 말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며, 어눌한 사람에게도 달변가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경청하는 사람은 대화의 흐름을 꾸준히 읽고 있기 때문에 적은 말을 하고도 말 주변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들을 수 있을까? 개인적인 의견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삶을 살아가면서 고민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한 없이 태평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말 못 할 고민 몇 개쯤은 있을 테고, 고민이 빈자리에는 새로운 고민들로 채워지곤 한다. 세어본 적은 없지만 개인의 고민을 이야기한다는 건 어쩌면 '안부 인사'만큼 흔한 일일지도 모른다.
유창하게는 아니더라도 친구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건 어렵지 않다. 반대로 그 친구의 고민을 듣고 함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건 어렵고, 무겁게 느껴진다. 간절해 보이는 두 눈에서 뚜렷한 해결방안을 기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면, 앉아있던 의자에 몸을 의탁하여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다.
본격적으로 고민을 가진 친구가 나에게 만나자고 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먼저, 나는 친구가 어떤 종류의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퇴사에 대한 고민일까? 연인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일까?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고민일까? 만약 마음을 깊이 있게 주고받은 사이라면 구체적이긴 어렵다라도 짐작할 수 있다. 친밀한 관계라는 건 서로의 인생에 있어 쉼표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과거에 어떤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면 그 주제는 그 날로 끝난, 마침표가 아닌 오늘로 이어지고 내일을 기약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다. 간혹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친하다면 어색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쉼표를 찍어줄 수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이니까.
처음에는 주로 가벼운 근황을 주고받는 편이다. 만나자마자 고민이 무엇인지 묻는 행위는 친구로 하여금 꼭 말해야만 하는 하나의 과업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몇 날 며칠, 혹은 더 오랜 시간을 고민했을 것이며 나 이외에 다른 누군가에게 이미 털어놓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고민'보다는 '친구'에게 집중해야 한다. 고민을 듣기 위해 만난 자리라고 해도, 먼저 꺼내지 않는 이야기를 묻는 것 자체가 하나의 부담이 될 수 있다. 기다려줘야 한다. 뭐, 어쩌면 고민을 듣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소중한 친구를 만나,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친구가 본격적으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면 내가 나임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가진 관점은 나에게 국한되기 때문에 친구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의 생각은 친구의 생각이 될 수 없다. 비슷할 순 있지만, 같을 순 없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참된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당장 해줘야 할 것만 같은 '의견'이나 '조언'에 집착할 경우, 위한다고 했던 말들이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알지 못하는 친구의 모습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나를 내려놓았다면, 친구의 호흡을 느끼며 따라 해 보자. 호흡은 가진 감정에 따라 다양해진다. 화가 날 때는 뿔 난 황소의 콧김처럼 거칠어지고, 기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진다. 친구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전하는 말들을 나에게 생긴 일처럼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려보자.
고민이 상사와의 갈등이었다고 하자. 친구는 갈등이 생긴 상황을 열심히 설명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친구 대신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이란 생각을 바탕으로. 그리다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되묻기를 통해 채워나가기도 하고, 어떻게 그려야 할지 헷갈리는 부분이 있으면 그 상황에 대한 추가 의견을 구하기도 한다. 또 어긋난 방향으로 그려질 경우에는 친구의 말을 잠시 끊기도 하며 과정을 반복한다.
경청이란, 아이들의 순수한 미소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그려내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있어 친구의 고민은 늘 생생하게 기억된다.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리며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그림은 늘 미완성이다. 친구의 고민은 나에게 말함으로써 해결된 게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곳까지 구석구석,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린 후 친구가 직접 마무리할 수 있도록 넘겨주어야 한다. 이것이 친구의 고민을 경청하는 사람의 중요한 몫이다.
정성껏 그린 그림을 넘겨주었다면, 그것으로써 나의 역할은 충분하다. 내 임의대로 답을 정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알려주는 건 그릇된 행동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고 정리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고민에 대한 진심 어린 친구의 경청이다.
함께 호흡하고, 있는 그대로 느껴보자. 나와 친구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잊은 채로. 비록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후유증이 들기도 하겠지만, 어떠한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순간을 보낸 우리가 서로의 마음속 아름답게 남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