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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Mar 20. 2024

서른일곱, 다시 시작해 보기로 결심하다

재입사를 선택한 것은 순전히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글에 들이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7개월 전, 정규직으로 근무하던 회사에서 퇴사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함께 근무했었고, 여전히 근무하던 선임은 야근 없는 근무 환경을 만들 거라고 했다. 교육 기관인 회사로 돌아오니 기대와는 달리 야근은 불가피해 보였다, 원한다면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담당자로서 맡은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회사에 남아야 했다. 회사에서는 누구도 야근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만한 일을 하루에 몰아주지도 않았다. 다만, 기한에 맞춰 끝내지 못한 일들이 쌓여갔으므로, 몇몇 일들을 늦게 시작하거나 더 미루어도 딱히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화사의 일원이자 한 분야의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느끼며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밤이 깊도록 키보드를 두드려야 했다. 

  

재입사라고는 하지만, 입사 첫날부터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다. 전임자가 해오던 일부터 새로 시작해야만 했던 일, 선임이 부탁하는 일까지 더해지며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그만두었던 1년 사이에 업무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후배 직급의 직원은 내가 입사한 날로부터 한 주 뒤에 계약이 만료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는 신규 후배 직원과 회사에 함께 적응하며 혼재되어 있는 시기별 업무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야만 했다. 특히, 선임과 후배 사이에서 내가 관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때로는 후배나 선배의 질문에 탄식하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골몰해야 했고, 때로는 이전에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의견을 내야 했다. 분초를 다툴 만큼 시한이 촉박한 일들도 틈틈이 발생했으므로 대부분의 일들은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일의 규모가 크거나 복잡할지라도 고민의 시간이 하루를 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내가 관여하는 센터의 일과는 별개로 스스로 해야 하는 나의 고유한 업무들도 당연히 있었다. 나는 나의 업무를 집중하여 처리하기 위해 점심을 빵으로 때우는 선택을 거듭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은 밀린 일을 처리하기에 효율적인 틈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고요한 공백이 이어졌으니까. 


나는 내가 감내하던 역할이 과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협력적인 자세를 철회하고 후배나 선임의 일을 그들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거나, 내가 맡은 일의 분배가 적절히 이루어지도록 상급자에게 거듭 요구했다면 일이 주는 압박감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만 생각하며 후배, 선임의 곤란함을 외면하거나, 그들에게 업무가 도리어 과중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타인의 업무를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담당자로서 겪는 고충을 그대로 이해하기 어렵듯,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게다가 나는 타인에게 도움을 잘 요청하지 못하는 편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무능감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안정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 과거의 경험과 켜켜이 쌓인 불안과 긴장의 역사로 쓰이게 된 색안경, 세상을 바라보는 색이 실제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회피를 거듭해 온 나의 선택들이 만들어낸 오류로 향하는 보장된 길이었다. 그러므로 도와달라고 말해야 할 때면, 쭈뼛거리고 의기소침해지는 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다. 


과중한 업무와 나만의 기준으로 공정하려고 애쓰던 경향,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태도는 심리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번아웃(burnout)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주말이 되면 외출이 어려워졌다. 심지어는 친구와의 약속을 무기한 미루기도 했다.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가 재밖에 없는 상태에서, 들려오던 나의 미약한 숨소리마저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었다. 문턱은 높았고, 창문은 굳건했다. 살아있다는 느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머리가 아파오도록 잠을 청하는 주말을 여럿 보냈다. 글을 쓰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는커녕, 업무 전면에 노출되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점심으로 밥을 챙기는 시간마저 부적절하게 느끼던 나는, 내가 머지않아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다.


Image by Tapani Hellman from Pixabay


운동을 시작하게 된 건 엉겁결에 하프 마라톤을 신청하면서부터였다. 병수는 3월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가 있는데 함께 참여하자고 제안했다. 운동을 딱히 배워본 적이 없던 나는 의외로 별달리 고심하지 않고 수락했다. 하프 마라톤을 덜컥 신청해 버린 것이다. 신청하고 몇 주 간은 하프(21KM)라는 종목을 완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준비 과정은 또한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지 못했다. 대회 참여를 준비하는 기간이 일부 필요하고, 대회가 한 달 정도 남았을 때 고려할 만한 일이라고, 속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동료 직원인 현수에게 묻고 헬스장을 등록했다. 서른일곱이 되어 헬스장을 처음 이용하게 되었다. 일찍이 전문 기구를 이용하여 운동을 해보고 싶었으나,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꿋꿋이 운동을 하는 것이 내게는 어렵게만 느껴졌다. 사실, 헬스장을 등록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헬스장 여러 곳을 목록에 두고 후기를 살펴보던 나는 등록하는 날까지도 이용할 곳을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비용보다는 집과의 거리를 우선으로 고려하며 가까스로 한 달 이용 등록을 마쳤다. 주눅이 든 상태로 헬스장을 이용하기 시작한 첫날, 심심치 않은 충격을 받았다. 고작 2~3KM를 뛰었는데 목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대회에서는 족히 10배는 더 뛰어야 하는데. 무턱대로 하프 마라톤을 신청했으니 기어이 사고를 친 것만 같았다. 


마라톤을 곧장 취소하지 않았다. 대회까지는 한 달 정도 기간이 남아 있었으므로 준비하는 데까지 해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리는 날이 늘어갈수록 신기하게도 더 먼 거리를 뛸 수 있게 되었고,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달리는 거리가 누적되는 만큼 대회에 대한 자신감도 늘어갔고, 무엇보다 신체가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번아웃의 여러 증상 중에는 무기력감이 있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현수가 괜찮은지 수시로 물어볼 정도로 생기지 않는 의욕으로 마음 졸일 때가 많았다. 무기력함이 최근의 나를 대표하는 상태로 자부할 수 있었는데. 들끓는 활력으로 오히려 일이 재미있고,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일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야근을 전제하며 일을 하던 습관도, 퇴근 이후에 운동을 해야 했으므로 업무 시간 내에 최대한 끝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하프 마라톤에 처음 참여하는 내게 한 달이라는 준비 과정은 짧은 듯했다. 대회 전날까지 5~6KM를 달리는 것이 최대였다. 사실, 나에게 21KM는 걸어서도 완주하기 힘든 거리였다. 병수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접수를 취소했을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만류했다. 종이인형(?)으로 불리던 녀석이 몇 시간씩 달린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을 테다. 참여하는 데에 의의를 둔다고, "너, 정말 괜찮겠니?!" 묻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얘기했다. 


대회 당일이 되었다. 속이 거북할까 봐 초콜릿을 몇 개 까먹는 것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병수, 그리고 함께 신청한 그의 친구는 일찍이 대회장에 도착하여 몸을 풀고 있었다. 옷을 서둘러 갈아입은 나는 시작 전부터 흐르는 콧물을 소매로 훔치며 짐짓 망했다고 생각했다. 대회에 참여하는 주변의 숱한 사람들을 보며 또한 '완주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거듭했다. 나시티를 입은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므로 내복을 두 겹이나 껴입은 내가 위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회가 시작되고 병수와 그의 친구, 나는 나란히 달렸다. 1KM를 지날 때마다 안내판이 보였다. 처음에는 21KM 완주를 마음으로 쫓았지만, 1KM씩 채워가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그간 준비했던 만큼 6KM까지 달리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7KM를 지나고, 8KM를 넘어가면서부터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속이 아픈 것이 어제 먹은 족발이 잘못되었나 싶었고, 발목과 무릎에 통증이 점차 느껴졌으며, 숨이 크게 가빠왔다. 12KM를 지나며 나는 병수와 그의 친구에게 "나는 아무래도 계속 달리기 어려우니, 먼저 앞서 가"라고 얘기했다. 병수와 친구는 내게서 점차 멀어졌고, 몇 분이 지나자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한강의 매서운 바람이 나를 더욱 질타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로 포기하는 거냐고, 고작 몸 이곳저곳에 무리가 온다고 완주를 포기하면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고 꾸짖는 것만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초라해진 나는 이어폰을 껴고 걷기 시작했다. 발목은 여전히, 무릎은 더욱 아파왔다. 내 옆으로는 내가 지나온 참여자들이 앞서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고르게 달려갔다. 그들을 곁눈질로 살펴보니 나처럼 완주 가능성을 따지는,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행들과 함께 나를 지나쳤지만, 혼자 달리는 사람들도 여전히 대회에 몰입하고 있었다. 계속 걸어서 간다면 시간 내에 완주는 어려웠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는 것은 시기상조임을 깨달았다. 아프지만, 달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더라도 계속 도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완주가 아닌, 1KM가 아닌, 한 걸음씩 집중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눈앞에 병수와 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통증으로 온 부위가 욱신거리는 상황에서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그들을 어느새 따라잡았구나!' 다리의 보폭도, 상체의 움직임도, 호흡의 간격도 출발선을 처음 넘어설 때처럼 안정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에게 다가서며 "파이팅!" 크게 외치던 나는, 완주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달리는, 한강의 이른 볕은 따사로웠다. 18KM 구간을 지날 때는, 심지어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저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나던 길에는 벚꽃이 이미 만개한 것처럼 화사했다. 처음 참여한 하프 마라톤에서 나는 결국 완주에 성공했다. 기록은 좋은 편에 속하지는 못했지만, 10KM도 채 달려보지 않았던 내게 결승점을 통과하던 순간은 기적을 마주할 때처럼 짜릿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나는 줄곧 스스로의 한계를 짐작하며 살아왔다. 다른 곳으로 이직이 어려우니 지금 회사에 대충 만족하며 살아가거나,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생겨도 감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겼다. 내가 생각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취업 시장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나를 다시 내몰거나, 사회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긴장감과 그로 인한 갈등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넘지 못할 것만 같았던 그 선은 과거의 경험과 불안감 높은 내가 만들어낸 허구의 선일 뿐이었다. 마라톤에 참여하며 깨달았다.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은 스스로 앞서 그은 한계 너머에 있다. 계약직으로 5개월 정도 더 근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지 못한 채 무기력감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안정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무슨 일을 하며 안정적으로 성취감을 경험할 수 있을까. 어떤 직장이 동료들과 연대하며 다닐 수 있는 곳일까. 이런 일이나 직장이 있기는 한 걸까. 만약,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면 나는 어떡하지. 다시 취업이 되지 않는다면, 원하는 일을 찾지 못한다면, 이대로 사회에서 도태되는 걸까. 생각들이 끝없이 밀려들며 한계를 지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무모하게도, 서른일곱이 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윽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선을 과감히 넘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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