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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pr 03. 2024

그래, 강릉으로 가자

상담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은솔은 누구나 알아주는 제주의 명예 홍보대사이다. 여행을 고민하던 동료들에게 제주도 여행 경험담을 풀며 누구라도 제주로 떠나게 만든다. 


"3일간 여유를 내서 제주도에 다녀올까 해요"

특별한 일인 양, 은솔은 두 달 전에 다녀온 제주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고백했다.

"오, 이번에 어디로 다녀오시게요?"

못지않게 제주를 사랑하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새삼스레 묻는다.

"딱히 정하진 않았는데.. 종달리로 다녀올 것 같아요"


은솔을 통해 알게 된 종달리는 조용한 동네였다. 뚜벅이로 여행하기에는 장소마다 공백이 컸다. 하지만, 독립서점과 카페 사이를 오가며 경험했던 종달리 거리의 고요함은 노이즈 캔슬링에 버금갔다. 취업에 대한 불안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설레는 마음으로 뒤바뀌던 순간이 떠오른다. 


달궈지던 정수리와 늘어지던 그림자, 그러나 이따금 불아오던 바람에 냉수로 세수를 하듯 환하게 웃는다. 누가 더 크게 '어푸' 소리를 내며 세수를 하는지 겨루던 초등학생 시절처럼, 깔깔거리는 소리가 이윽고 크게 퍼지던 그때처럼 마음으로 미소가 번진다. 


"한 달 살기를 해보려고 하는 데 어느 지역이 괜찮을까요?"

특별한 일이 된, 한 달 살기에 대해 도움을 얻고자 은솔에게 물었다.

"오, 그러면 제주는 어떠신가요?"

은솔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전생에 제주 도민이었을까.

"오.. 제주 좋지요.."

기계적인 웃음과 목소리. 자동화된 리액션이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종달리가 포근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제주 한 달 살기는 일찍이 포기했다. 여행을 떠나야 할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래저래 찾아본 제주의 숙소 대부분은 예약이 차 있었다. 그나마 예약할 수 있는 숙소는 비싸거나 접근성이 나빠 보였다. 차를 집에 놔두고 떠나기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탁송을 하기에는 기간도 짧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5월부터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으므로, 지원한 회사의 면접 기회가 생기게 되면 아무래도 제주는 곤란할 듯싶었다.


"야, 요새 남해에서도 한 달씩 많이 산대"

'야'라고 나를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누나밖에 없다. 

"어.. 어... 나.. 남해 좋네"

듣는 둥 마는 둥,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누나는 '남해 살기'가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합리적인 편인 누나의 조언은 늘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누나의 말을 따르는 것이 분명 합당할 텐데...'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의견을 고수하고 싶고, 누나가 말한 것의 반대되는 무언가를 반드시 선택하고 싶다는 고집이 먼저 샘솟는다. 


숨을 고르며 한 달 살기 목록에 남해를 이내 추가한다. 이전 여행 경험과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을 받아 부산, 전주, 경주와 같은 지역도 찾아보았다. 차로 이동하는 거리나 비용, 숙소의 감성, 손님의 숙박 가능 여부, 5월 출근 가능성을 함께 고려하였다. 이러한 조건을 따지다 보니 위치는 서울 근교여야 했고,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강원도, 그것도 '강릉'에 눈길이 머물기 시작했다.


강릉과의 첫 만남은 복지관에서 근무할 때였다. 스치듯 방문했던 안목해변의 카페거리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카페에서 직원들끼리 모여 앉아 한 시간 남짓 아메리카노를 허겁지겁 마신 기억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안목해변의 풍경보다 데인 입천장의 감각이 더 선명하다고나 할까.


강릉을 다시 찾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근무하던 가족센터에서 퇴사하며, 다른 회사에 곧장 취업이 되었다. 4일간의 여유가 다만 생겼었고, 여행이라도 떠나지 않으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낼 것 같아 급히 알아본 곳이 강릉이었다. 여행 가기 하루 전에 장소를 결정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같은 날, KTX 기차 예약을 깜빡하여 마음 졸이며 애플리케이션에 밤늦게 접속했던 순간이 생생하다. 그리하여 2박 3일 동안 강릉에 머물게 되었다. 한쪽 벽면이 모두 창으로 되어있고, 그 창을 통해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으로 숙소를 예약했다. 한편으로 방음이 잘 되지 않아, 잠을 잘 때에 파도소리가 은은하게 들리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두 번째 강릉은 내게 이상적인 여행으로 기억된다. 그동안 다닌 여행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숙소였다. 쾌적해야 한다거나, 소음이 적어야 한다는 기준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되었다. 이 시기에 머문 숙소는 그간 묵었던 숙소들에 비해 쾌적하지 않았고, 소음이 자주, 크게 들렸다. 귓가에 자장가처럼 퍼지기를 기대했던 파도소리가 제법 웅장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느 여행에서보다 편히 쉬어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밥을 잘 먹었고, 여유로움에 충분히 머무를 수 있었다. 하루 최소 두 끼를 강릉 지역의 맛집으로 끼니를 때웠다. 장칼국수, 수제 햄버거, 간짜장, 텐동을 차례로 먹으며 '이래서 여행을 가는구나!' 새로이 실감했다. 숙소 근처에 있던 고층 카페는 경관도 좋았지만,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어 고요했다.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해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전 직장에서의 회한과 마주하며, 긴 숨을 이따금 내쉬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아물다'라는 북카페를 이용했다.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아물다는 전 방문자가 남긴 쪽지를 랜덤으로 뽑아 소장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분위기도 좋았고, 커피도 맛있었다. 특히, 상담 공부를 하고 있는 내게 '마음'과 관련된 책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카운터에 있던 사장님에게 '다음 브런치 통해 알게 되어 방문했어요' 인사하고 싶었지만, 작은따옴표에서 드러나듯 마음으로만 알은체 했다. 


내게는 마지막이자 만족스러웠던 여행지, 집과의 거리나 숙소의 조건 같은 까다로운 요구들에 부합하는 곳은 아무래도 강원도, 그것도 강릉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Image by Jo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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