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생활을 시작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내비게이션에서 '집'을 눌렀다. 소속되어 있는 상담학회에서 자격증 필기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인터뷰 영상을 촬영하는데 인터뷰이로 나를 초대해 주었다. 촬영은 사흘 뒤였지만, 서울로 일찍 내려간 이유는 '사람'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간의 생활을 돌아보면, 정서적 교류의 단절을 타지 생활의 어려운 점으로 꼽을 수 있다. 강릉으로 숙소를 예약할 때부터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염려했었다. 실제로 내려와 보니 단절감이 상당했다. 음식이나 음료를 주문할 때 빼고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이따금 통화를 하거나, 온라인 화상으로 미팅을 할 때, 가늘게 변한 목소리를 듣고는 놀라는 반응을 대부분 보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당근이나 문토 어플, 네이버 카페를 들락날락하기도 했고, 단기알바나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를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성별이나 나이, 근무 기간이나 조건이 맞지 않아서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다.
철저하게 고립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활동적으로 생활하도록 도운 것들이 있다. 잘 먹고, 충분히 자고, 꾸준히 운동하고, 글을 쓰는 데 의식적으로 기울인 시간과 노력만큼 기능적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턱끝까지 차오른 외로움으로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생산적인 활동을 찾거나, 할 의욕이 나지 않으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영상처럼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보며 빼곡히 쌓인 외로움을 부인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면으로부터 시선을 들릴 도구가 필요했다.
카르페디엠(카페)으로 가는 길이었다. 해변가에서 아빠와 아들로 추측되는 이들이 보았다. '아빠, 배경이 이런 식으로 나오도록 찍어야지!' 사진 구도를 잡아주는 아들의 손동작을 목소리로 표현하면 이러했을까. 바다와 모래의 경계에서 다시 자세를 취하는 아들. 그러한 아들을 핸드폰에 담는 아빠의 동작이 아무래도 어설픈 것이 아들이 기대하는 구도로 찍히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빠가 찍어준 것이 인생 사진은 아닐지라도, 아빠와 떠났던 여행의 일부가 되어 그때의 순간을 과정으로 추억하도록 도울 테다.
'아이, 봐봐. 아빠는 아무리 설명해 줘도 사진을 이렇게 못 찍는다니까. 이날 기억하지? 아니, 밤에 영진해변에서 다 같이 모둠회 먹었던 날 있잖아. 아빠 신나서 숙소 가는 길에 혼자서 춤췄던 날...'
"아이고, 아들 어서 와" 현관으로 들어서는 나를 엄마가 반겼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엄마는 거실에 있는 리클라이너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저녁 먹었어?" 엄마는 물었다. 안 먹었다고 대답하니 고기를 구워주겠다고 했다. 구워진 갈비와 쌈채소, 반찬들이 좌식 테이블 위로 깔렸다. 익숙한 냄새와 식기, 맛도 집안 분위기도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엄마는 내가 여행 가기 전에 구매해 준 가수의 시디가 도착했다거나, 은행에서 저축성 보험에 가입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후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엄마는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먹고, 누구를 만났고, 생활하는 곳은 어디며,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나는 먼저 말하지 않았다. 사람이 그리웠던 만큼, 주저리주저리 떠들 수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강릉에서의 삶이 어땠는지 엄마가 먼저 물어봐 주길 바랐다. 엄마는 자신이 어떻게 지냈는지만 내게 들려주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엄마는 도리어 무엇이든 내가 먼저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엄마가 흥미가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어김없이 침묵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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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으로 오기 한 주 전, 엄마와 중식당에 갔었다. 그날은 잔여 휴가를 사용한 날이었다, 집을 비우기 전에 엄마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점심으로 대접하고 싶었으므로 정오가 가까울 무렵 식당으로 향했다.
"밥그릇에다가 숟가락 세워서 꽂지 마. 안 좋은 거야"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는 말했다. 충고할 때 나오는 목소리 톤이었다. 화가 일순간 치솟은 나는 식욕이 말끔히 사라지는 순간을 체험했다. 이날도 엄마는 그랬다. 여행으로 어디를 가는지, 어떤 계획을 세웠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간 진척이 없던 독립 준비로 엄마는 대화를 끌어갔다. 집은 어디로, 언제 구 할 건지, 누나가 정보를 많이 알고 있으니까 자주 물어봐야 한다며 질문을 가장한 조언과 주의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이 상황으로부터 엄마와 끊임없이 나누었던 집, 결혼, 직장에 관한 대화와 좌절의 순간들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제사상에서나 하는 행동이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말은 도화선일 뿐이었다. 나는 말했다. "엄마, 나 지금 화가 났으니까 시간을 좀 주세요" 엄마는 화가 났다는 나를 나무랐다. 네가 화가 날 상황이 아니라고.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물어볼까?" 숟가락을 뜨지 못하는 내게 웃으며 말하는 엄마가 보였다. 나는 물었다. "아니, 나 이제 강원도에서 한 달 지내다가 오는 데, 그게 오늘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얘기야?" 엄마는 그러면 언제 얘기하냐고 다시 물었다. 중식당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동네에서 유명한 식당이었으므로 손님으로 북적였기 때문이다. 복작한 환경에도 단무지를 더 달려든 지, 짬뽕을 주문한다든지 하는 소리가 배경으로 깔렸다. 무대 위에서는 엄마와 내가 서로의 아픔을 줄줄이 매달고서 숨죽이며 대치하고 있었다.
상담 공부를 하며, 억압되어 있던 엄마를 향한 원망의 감정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통제하며, 스스로 자율성을 키워갈 기회를 빼앗아갔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좋은 아들이어야 했다. 일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들답지 않게 엄마를 살뜰히 챙기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엄마가 나를 한 번이라도 더 돌아보고, 내게 필요한 사랑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수호야,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어?"
"아이고, 고생했네. 우리 수호"
"응, 엄마가 사랑해"
내게로 향하는 말을 엄마에게 듣고 싶었다. 내가 포함되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엄마가 오늘..."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가 이번에 콘서트를 한다는데..."
"옆집에 글쎄...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나는 엄마에게 늘 부족한 대상이었다. 언제부턴가 엄마가 조언이나 충고를 하면 수치심이 몰려왔다. '역시, 지적받지 않으려면 어떤 행동도 기왕이면 하지 않는 게 좋아'라는 생각을 나는 품게 되었다. 엄마의 기대에 부합하는 아들이 되기 위해 엄마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말도 가려서 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도 나도 속여가며 그럴싸한 아들을 연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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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끼, 우리 집에 언제 와?"
어느덧 열 살이 된 조카 우진이가 말했다.
"어어, 오늘 축구하러 몇 시에 간다고 했지?"
도서관에 들렀다가 축구하러 간다는 우진이의 얘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우리? 지금 출발해서 도서관 들렀다가 갈 건데~"
우진이의 명랑한 목소리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 그래? 그러면 삼촌도 곧 출발할게"
"어, 알겠어~"
도서관 근처에서 조카들과 만나 매형의 차를 타고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10분 남짓한 시간으로 한두 차례 쉬고, 세 시간 가까이 축구를 했다. 하프마라톤에 참여한답시고 단련한 몸이었지만, 조카들과 뛰어노는 데는 체력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조카들과 놀며 나는 깨달인 점이 하나 있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의 중요함이다. 우리는 축구를 하며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패스' 혹은 '슛'을 외치거나, 까불거리는 조카들의 언어가 전부였다.
하지만, 축구를 마치고 누나와 매형이 합류하여 함께 저녁을 먹을 때, 평화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테이블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익어가는 고기를 가만히 바라보던 조카들과 나.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아도 그 순간의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조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그저 몰입했을 뿐인데. 말하지 않아도, 행동하지 않아도 조카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진이, 서진이와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숯불보다 따사로운 온기가 서로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걸 느꼈다.
강릉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 부모님과 남산에 올랐다. 동네에서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말하던, 엄마의 미간에 진한 주름이 잡혔다. 눈 사이로 주름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내내 보아왔지만, '아이고, 엄마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네...' 마음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겨운 현실, 이를테면 근속하지 못하고 번번이 그만두는 회사, 치솟은 집값, 어려운 결혼, 만족스럽지 못한 인간관계, 단 하나라도 괜찮을 만한 게 없었다. 나이도 어느새 서른일곱으로 어디 가서 젊다는 얘기를 꺼내기 어려웠다. 고통스러운 삶의 순간들을 부인하고 싶을수록 나에게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게 어린 시절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충족과 좌절을 반복하던 엄마라는 대상이었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사랑을 바라는 아이가 아니다. 내가 원망하던 대상은 엄마라고 새겨진 내면의 잔상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날 때부터 있었다. 다만, 타인과 세상이 내게 불만족스러웠으므로 엄마가 남긴 몇몇의 흔적들을 탓하며 해낼 수 없다고 믿었다.
엄마는 한순간도 나를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다. 마음을 잃은 적도 없다.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 주었다.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
강릉으로 다시 돌아와서, 엄마를 생각한다. 서울에 내려가서 만난 엄마, 내재화된 엄마가 아니라 실존하는 대상으로 만났던 엄마는 칠순을 앞둔, 친구가 적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조카들을 돌보지 않는 날에는 말을 드물게 하는, 외로운 사람이다.
강릉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한 가지 다짐한다. 서울에 올라가서,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려고 한다. 만족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려고 한다. 한정식을 먹고 싶다고 했으니 엄선해서 가보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도 했으니 서울 근교로 다녀오려고 한다.
나는 이제야 엄마의 사랑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언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말의 의도를 곱씹어보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긴다. 소란스럽게 부딪치는 파도와 고요한 수평선을 함께 내다보며 주먹을 힘껏 쥐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