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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May 13. 2024

나 여기, 있는 그대로 괜찮을 지도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2학기부터 인근 교육 기관에서 조교로 근무했다. 모아 두었던 돈은 적잖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7년 정도 해왔고 소비를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적은 급여에도 돈이 점차 모였다. 최저급여를 받는 조건이었지만 그럼에도 조교로 취업을 선택한 이유는 역시 자존감에게 쫓겼기 때문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취업했던 내게 사회생활은 처절한 분투의 시간이었다. 대학생 때까지는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이 생겨도 회피할 있었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친구와 멀어지거나 하는 정도로 삶에 미미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스트레스 상황에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면 나 자신과 동료, 부서, 회사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유독 나에게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선, 후배들은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표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들의 의견을 고려하여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낮추고 주변 사람들을 높이는 태도는 친절하고, 겸손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비쳤다. 사람 앞이라면 미소를 머금으려던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 효과적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좋은 사람으로 불렸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지 못했다. 호감을 얻기 위한 목적이 마음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스스로를 낮추다 보면, 타인이 자신의 경계를 쉽게 침범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조교로 근무하던 시절에 나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을 특히 만났다. 이 시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스스로 보기에 '그럴싸한 직업'을 포기한 때이기도 했다. 주변 친구들처럼 과장이나 팀장이 아닌 특수대학원의 학생으로, 정직원이 아닌 조교라는 조건으로 살아가다 보니 타인과 나를 유독 비교하게 되었다. 나를 타인보다 낮은 위치로 두며 환심을 사는 전략을 선택할 정도로 자존감이 이미 낮았었는데, 더욱 낮아질 만한 환경을 살아가며 그 어느 때보다 친절하고, 겸손하고, 다정해져 갔다.


근무했던 기관에서는 전화 업무가 많았던지라 언제부턴가 특유의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업무를 수행하며 스트레스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고, 대학원 생활을 병행하였으므로 휴식을 위한 여유 시간은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담당했던 업무로 민원 전화가 유독 자주 걸려왔는데, 경험했던 민원인의 대부분은 상대를 봐가며 언성을 높였다.  


"하.. 말 진짜 안 통하네..."

날이 바짝 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덤덤하게 물어보던 그가 일순간 태도를 바꾸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기관 규정상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기관 규정을 누누이 설명해도, 그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도 급급히 소리쳤다.

"아이.. 똑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게 하는데.. 나 바쁜 사람이에요!"

"..... 죄송합니다.."


간혹 책임자를 바꿔달라는 전화도 있었는데, 이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표현하는 편이었으므로 고생이 많다는 상급자의 피드백을 받고는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든 관철시키겠다는 유형의 사람들과는 서로가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주고받을 수밖에 없도록 조건이 구성된다. 조교에게는 기관의 규정을 예외로 둘 수 있는 마땅한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실수로 만약 민원인이 피해를 본 상황이라면 사과를 먼저 하고 피해 보상을 위한 대책을 안내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민원인의 실수로 발생한 상황 때문에 조교 신분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죄송하다는 대답 밖에 없었다.  


끝없이 추락하던 자존감과 발생하는 스트레스 사건들로 생전 경험하지 못했던 증상들이 나타났다. 손과 발이 저리고, 손가락 끝에서 땀이 유독 새어 나왔다.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리로 찬기운이 내내 돌았고, 구토가 간혹 나왔다. 또한, 전반적으로 기운이 없고, 한 가지 활동에 집중하기 어려워했다. 갑자기 나타난 신체 증상으로 가정의학과를 방문하기도 했었지만, 뚜렷한 원인을 찾지는 못했다. 


그런데, 어떠한 전문적인 치료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신체 증상이 사라지는 기적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던 양재동 어느 거리에서 골목으로, 골목으로 접어들던 때였다. 선선한 바람에 풀잎이 슬며시 흔들리는 장면에서 엄마가 잠든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모습이 떠올랐다. 어제와 내일에 머무르려고 하는 나를 일깨우듯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햇볕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미끄러지며 한 여름의 파도처럼 찰랑이듯 내게 다가왔고, 고요함이 일순간 나를 휘감았다. 머리로부터 느껴지던 전율이 이내 온몸으로 퍼졌다. 내게는 오직 '순간'만 있었다. 불안정한 사회적인 위치나 근무 환경의 잔상이 말끔히 사라졌다. 찰나와 같지만 영원한 듯 인식되던 그 순간에 연기처럼 순식간에 통증이 떠나갔다.    


의식이 확장되고,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며,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체험을 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자 건강이 회복되었고, 다음 날부터 아무렇지 않게 다사다난한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을 순간마다 알아차리는 일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이때 깨달을 수 있었다. 


Image by ���Nowaja��� from Pixabay


글쓰기만큼 애정하는 활동은 역시 '걷기'이다. 서울 곳곳에는 걸음으로 새긴 나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삶이 불만족스럽거나, 공허한 느낌이 들거나, 외로울 때마다 길을 걸었다. 동대입구역에서 남산에 올랐다가 남산도서관으로 내려오는 코스부터 경의선 숲길에서 신촌에 이르는 코스까지 시기마다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 길에는 걸음이 있고, 땀이 있고, 호흡이 있고, 알아차림이 있었다. 


동해시에서도 걷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동해에서도 부곡동이라는 지역에 정착했다. 지도로 보이는 한적한 느낌과 조용하니 머물기 좋다는 이용 후기가 지역과 숙소를 결정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숙소에 처음 짐을 풀고 먼저 한 일도 동네 걷기이다. 서울에는 집에서 인접한 위치에 크고 작은 마트들이 있어 장을 보는 데 별다른 불편함이 없다. 강원도에서는 다만 하나로마트가 사는 곳에서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가 생활 편의를 따져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며, 헬스장을 다녀오며, 지역의 맛집을 찾아가며 부곡동 골목, 골목을 걸었다. 걸을수록 고즈넉한 '동네'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프랜차이즈 식당이나 카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편의점 두 곳이 늦은 시간까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좁은 길가를 밝혔고, 밤 열 시만 되어도 인적이 드물었다. 또한, 노래를 하나 흥얼거리며 완곡하면 하평해변에 이르는 길에 있었는데 특히 애정하는 곳이다.


동네 곳곳을 호기심으로 걸어 다니면서도, 낮아진 듯한 자존감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종용하는 듯했다. 백수라는 신분을 가진 지도 3주가 되었다. 보드게임 모임을 제외하고는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여행을 떠나 있는 상황이라지만 여행이 또한 끝나가는 시점에서 현실적인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곧장 취업이 될까? 일전에도 3개월 동안 취업이 안 되었던 때가 있었는데...' 

'사람들과 다시 잘 만날 수 있을까? 서울로 돌아왔다는 연락을 뜬금없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에 대한 불안으로 여유로웠던 걸음은 빨라져만 갔다.


내가 나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는지도 모르는 채,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알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막무가내로 방향을 틀고, 틀었다. 그러자 단독주택이 즐비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마주 오는 차 두 대가 거뜬히 지날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는데, 나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파랑으로 색칠된 주택의 대문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활짝 열린 대문 너머로는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던 내게 어떤 이미지가 불쑥 떠올랐다. 밤이었다. 선물을 양손 가득 싸든 사람들이 대문으로 들어섰다. 길을 따라, 평상으로 들어서던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고향에 들른 이들처럼 순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평상으로 갖은 음식을 나르던 나는 손님들을 발견하고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반긴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사 오셨어요~" 그들이 쥔 선물을 나눠 들며 평상으로 안내한다. 준비한 음식을 이윽고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운다. 그곳에는 사람들 간의 높고 낮음이 없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뿐이다. 내가 말을 많이 했다 싶으면, 네게 마이크를 돌리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감도는 침묵에도 말을 구태여 꺼내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감각만 있다면 충분한, 이어지던 상상 속의 주택은 그런 느낌이었다. 


낮은 자존감으로 불안정한 상태의 나는 줄곧 나를 구원해 줄 환상의 대상을 쫓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숱하게 배회한 이유도 안정감을 찾기 위해서였다. 과거에 허락되지 않았던 정서적인 품을 갈망하며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나타나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얻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행동, 자세를 낮추는 동작과 그로 인해 쉽게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더욱 사라지던 자존감과 이어지던 스스로를 향한 학대의 표현들. 이는 지금 이대로는 괜찮지 않다는, 불안정함에 기인한 다급한 걸음과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결말의 연속이었다. 


편히 쉬지 못하고 어떤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결심 속에는 타인을 향한 인정의 욕구가 숨어있다. 인정을 받으면 성취감을 경험하고, 효능감이 올라가기도 한다. 나에게는 다만 타인의 인정이 필요했던 이유는 호의적인 느낌을 받기 위해서였다. 호의적인 마음이 발전하여 호감이 되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내 삶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추락해 가는 나를 언제고, 언제고 돌봐주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으로 결핍된 스스로를 외면했고 불안정한 나를 보듬어 줄 대상을 기다렸다. 나만이 오직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줄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행복감은 코끝으로 스치는 봄꽃의 향과 같다. 순식간에 다가와 소리 없이 사라진다. 반짝하듯 사라지는 행복감을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는 그 순간에 흠뻑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걸으면서 경험하는 행복감, 경이롭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나는 좋아한다.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물론 불행한 순간도 있고, 특정한 경험을 행복이나 불행처럼 단편적으로 해석하기는 또한 어렵다. 걷는 순간의 나는 그리하여 발바닥이 아프거나, 무릎이 쑤시거나, 숨이 차오르기도 하지만, 마음과 몸이 연결되며 서로를 알아차리는 경험을 위해, 불안정한 상태를 깨달으며 그저 나로서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동해시 곳곳을 꾸준히 걸어보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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