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의 삶이 끝나가고 있다. 한 주 뒤면 성남에 있는 대학교로 심리상담을 하러 간다. 한 달 가까이 집을 비우는 여행은 처음이다. 익숙한 환경에서 장기간(?) 자발적으로 벗어나 보낸 시간을 회상하니 감회가 새롭다. 이번 여행의 중요한 키워드는 '생활'이다. 물리적인 독립을 통해 심리적인 독립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관광의 목적보다는 그간의 삶을 성찰하고,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삶의 이정표를 보수하여 새로운 지점에 꽂는 일이었으므로 컨디션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운동과 식사, 수면에 관하여 적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점도 매일의 상태를 위해서였다. 서울에서와 같이 피곤하다거나, 배가 부르다고 하여 '나'를 생각하는 시간을 미룰 수 없었다. 강원도에서 보내는 한 달이라는 제한된 기간 안에서 인생의 해답을 얻고 싶었다. 희미하다고 느껴지는 한 줄기 빛이라도 '나'로부터 시작하여 발자리 앞으로 비친다면, 더듬거릴지라도 믿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찰적 글쓰기를 통해 나에 대해 꾸준히 고찰해 볼 수 있었다. 특히, '분노'라는 감정을 스스로 거부할 때가 많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과거에 한 친구에게 반듯한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나를 '두부류'로 분류했었는데, 타인의 어떠한 행동도 잘 받아줄 것 같은 편안한 인상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했다. 나의 성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나는 선함을 지향한다. 친절하고 다정한 느낌이 나도록 행동하는 편이다. 착해 보이는 외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착해 보이고자 노력하는 나는 화를 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화날 만한 상황에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뒤돌아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서리쳤던 경험이 많다. 스펀지처럼 어떤 말이든 우선 받아내려는 내가, 가득 머금은 물을 타인에게 일순간 짜낸 이야기를 하면 놀라는 반응을 공통적으로 보인다.
두 번째 회사에 근무할 때였다. 센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고객들을 초대하여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는 송년 행사를 담당했었다. 큰 규모로 진행되었으므로 내가 속한 부서 직원들 모두가 투입되어 분담한 역할에 따라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 명이 넘게 참여하는 행사를 담당하는 게 처음이었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걸 느꼈다.
'배달음식이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현장 접수 인원이 예상보다 많으면 어떡하지?'
"행사 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을까?'
근거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지만, 인식할 여유는 없었다. 혼자 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행사 준비에 실제 문제가 생긴 것처럼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오고, 동료들과 일정 시간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고양된 상태가 지속되었다,
"수호샘, 이거 테이블을 앞당겨서 배치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배치를 마친 테이블의 위치를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게 어떻겠냐고 팀장님이 말했다.
"아, 지금은 시간이 빠듯해서 무대 앞쪽에 여유를 두는, 지금 그대로가 좋을 것 같아요.."
테이블 배치 이외에도 행사를 위해 준비할 일들이 많았으므로 그대로 하자는 의견을 나는 말했다.
"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테이블 위치를 앞당기는 게 어떻겠어요?"
행사 시작이 한 시간 남은 상황에서 팀장님은 물었다. 그때는 실무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내게 물어보고 최종적으로 조정하고 있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화재가 산발적으로 발생하기라도 한 듯 자잘하게 일어난 불씨를 끄기에 급급했던 내게 팀장님의 말은 '화재 속의 나'를 직면하게 했다. 긴장감이 넘치는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물리지 않으면 큰 불로 번질 것 같은 팀장님의 모습은 나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듯했다. 팀장님에게 나를 투영한 나는 덜컥 화를 내고 말았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 이후로 행사가 끝날 때까지 팀장님과 나는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행동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행사장을 정리할 때 팀장님에게 찾아가 사과했다. 팀장님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말을 걸면 왠지 안 될 것만 같았어요" 팀장님의 이 말이 그날 있었던 이야기의 마지막 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엄마는 불안정한 존재로 나를 보는 경향이 컸다. 서른 정도에 엄마 앞에서 절규하는 사건이 있었다. 고민 끝에 주문한 옷을 처음 보고는 엄마가 '구김이 많이 가는 재질이다. 색깔이 별로다. 왜 이렇게 비싸게 주고 샀냐' 같은 따끔한 언어들을 쏟아낸 날이었다. 새로 구입한 옷을 이내 발견하고 관심을 보일 엄마를 생각하며 옷의 크기, 색깔, 가격, 재질을 두고 며칠 동안 고민했다. 나는 옷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엄마의 물음은 파도와도 같았다. 하나를 물어봐서 대답하면 다른 무언가를 재차 물어왔다. 마땅히 대꾸해도 이어지는 엄마의 지적에 화가 돌연 치솟았다. "이제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착함의 틀에서 배회하던 나는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엄마의 평가는 어릴 때부터 꾸준히 이루어졌다. 외출하는 복장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때면 전신거울 앞에 서서 한참을 말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갈아입을 옷도 마땅히 없었고, 갈아입어도 '나'나 엄마 그 누구에게도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들이 거울로 비췄다. 옷뿐만 아니라 큰 코나 돌출된 입, 좁은 어깨가 부각되며 눈에 띄었다. 옴짝달싹 못하며 서성이다 보면 언제 나갈 거냐는, 농담을 가장한 등 떠미는 언어가 들려왔다.
엄마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작은 흠집이라도 발견하려는 듯한 엄마로부터 안정감을 되찾기 위해 엄마의 말을 따르는 선택을 거듭해 왔다. 옷이 별로라고 하면 망설이다가도 갈아입었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나를 이리저리 들추어 보는 경우가 늘어갔다. 엄마가 하는 일상적인 말조차 지적을 위한 의도로 오해한 적도 많다. 그만큼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지 않는, 기어코 한 마디라도 보태어 혼란스럽게 하는 엄마로 불안정한 날들을 보내왔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균형을 찾아간 데에는 표현의 힘이 컸다. 좌절하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때로는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평소에 사용하는 정도의 범위에서 언어를 선택했으므로 크게 뾰족하지는 않았겠지만, 보다 분명하고 단호했다. 엄마는 언제부턴가 내 성격이 예민하다고 말하며, 무슨 말을 하더라도 조심하게 된다고 했다.
나에게 말하기 전에 신경을 먼저 쓰게 된다는 엄마의 표현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대로 거리를 두며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엄마로 인해 불편했던 마음을 전달하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돌아보며 깨닫는다. 중요한 건, 그 순간에 드는 감정을 스스로 인식하고 알아주는 것이었다. 엄마의 지적과 절망이라는 시소 타기에서 내가 주로 느꼈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나는 인정 욕구가 큰 편이다. "잘한다" 같은 반응이 나로 하여금 잘 해내고 있다고 지각하게 한다. 잘한다는, 잘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뚜렷하고 클수록 스스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잘 못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하는 타인의 언어적, 비언어적 반응에는 수치심을 느낀다.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부끄럽고, 숨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는다. 수치심이 클 때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타인에게 동화되어 어떠한 개인적인 말과 행동도 용인되지 않는, 꼼짝 못 하는 상태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내가 여기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어떻게든 발버둥 치지 않으면 이대로 사라지고야 만다는 공포감에 기반한 생각들은 벼랑 끝 외침과 같이 '발끈'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구현된다.
화를 표출했던 순간들은 돌아보면 사람들이 한 행동보다 내가 드러낸 분노의 정도다 컸다. 이는 분명, 내재된 수치와 공포의 역사가 분노라는 감정을 파괴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결과이다. 내가 화를 냈던 상황들을 면밀히 들은 누군가는 분노의 표현이 적절했다고, 왜 화를 더 내지 않았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화가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충동적으로 누군가에게 향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편치 않은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알아주고 싶은, 안아주고 싶은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여섯 살 때 피아노를 배우는 유치원에 다녔다. 베토벤 반이었는데 나는 친구들보다 단조로운 곡을 연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비교했거나 누군가가 평가하는 말을 들었던 듯싶다. 그때의 나는 피아노를 잘 쳐서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잘하고 싶었지만 건반을 제때 누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연말에 했던 공개 연주회에서는 계획했던 곡보다 간단한 곡으로 바꾸어 연주했다.
학부모들이 모여있는, 제법 큰 규모의 무대에서 나는 연습한 곡을 씩씩하게 쳤다.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렇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원래 연습하던 곡이 아니었고, 앞서 연주한 친구들이 더 잘 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주를 한 누구에게나 들려주는, 으레 치는 박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으로 투영된,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 나는 최선을 다했다. 따라 하기 어려운 악보를 소화하기 위해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이던 나는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다. 여차하여 바뀌게 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 한 번 더, 한 번 더 연습했던 나는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