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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n 27. 2024

뜨거운 찻잔을 기꺼이 내려놓음으로써

서울 집으로 돌아온 나의 또 다른 변화는 방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나는 강원도에서와 달리 집에서 방으로 생활공간이 급격하게 좁아드는 상황에 맞닥뜨려야 했다. 며칠은 좋았다. 익숙한 베개 커버에 볼이 닿는 감촉도 좋았고, 대학원에 다닐 때 구입한 이케아산 스탠드 불빛도 여전히 은은했으며, 기지개를 켜며 맞는 아침도 상쾌했다. 강원도에서 거주했던 두 아파트는 12평과 20평에 달한다. 서울 내 방은 2평 남짓이다. 집과 방을 단순히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혼자서 집 내부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때와 엄마나 아빠와 수시로 마주치며 공간을 사용하는 건 의미가 다르다.


독립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긴 건 강원도에서 보낸 시간 덕분이다. 그러나 강원도에서 확인한 서울 집값은 그동안 모은 돈을 크게 상회했다. 체중을 20kg 가까이 감량하고 살 빠지기 전에 입던 바지를 다시 입어볼 때처럼 채운 곳보다 빈 곳이 더욱 눈에 띄었다. 당장 혼자 살 수 없다면 방을 쾌적하게 꾸며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벽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찬 책장 속 책들, 필요치 않은 짐들로 널브러진 책상, 사계절 옷이 공존하는 행거에 이르기까지 정리하면 나아질 구석은 충분했다. '서울에 가면, 서울만 가면 하루종일 머물고 싶은 방으로 탈바꿈시키리라!'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이곳은 창고인가.. 방인가..

 

한 달 만에 마주한 내 방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10년 전에 아이폰을 개통하며 받은 계약서가 책과 책 사이에 꼬깃꼬깃 끼어있었다. 회사에서 받은 수료증은 두서없이 제각각 접혀있었고, 심지어는 책상과 책장 사이에 언제 받았는지 모를 초상화가 액자에 담겨 있었다. 모기에게 물린 부위를 막상 발견하고 나면 가려움을 견디기 몹시 어려운 것처럼 눈에 띄는 물건부터 하나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목욕탕에 들러 때를 밀었을 때 드는 상쾌한 기분(...^^)처럼 방의 외관을 둘러보는 내게 개운한 느낌이 전해졌다. 책장에서도 마름모무늬의 베이지색 벽지가 보이게 되었고, 책상은 괜히 오래 앉고 싶을 만큼 여유롭게 탈바꿈했다. 정리의 효과를 경험하고 나서 다음으로 마음이 향한 곳은 옷장이었다. 내 옷은 대부분 행거나 옷방에 모아져 있다. 두텁거나 덜 입는 옷은 옷방에 따로 두고, 가볍거나 자주 입는 옷을 행거로 옮겨두는 식이다.  


내 방에 있는 옷장은 화이트톤이다. 아파트 현관문 정도의 크기이고, 여닫이 문이 침대와 맞닿도록 배치되어 있다. 아랫 칸은 강제적으로 창고로 사용해야 하고, 윗 칸은 이상하게 손이 가질 않아 마찬가지로 창고가 된 지 오래다. 강원도 생활의 효과와 책상을 만족스럽게 정리한 경험이 남아있을 때 열어보기로 결심했다. 윗 칸과 아랫 칸 모두에서 잊고 지냈던 옷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어떤 옷은 심지어 산 기억조차 없고, 어떤 옷에는 사연이 절실히 묻어 있어 공연히 회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 생애 첫 정장


누나는 내가 군대에서 전역하는 해에 결혼했다. 정확하게는 전역 날로부터 보름 뒤였다. 23살이었던 나에게는 정장이 없었다. 입을 기회도 없었고,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나는 자신의 돈으로 정장을 맞춰주겠다며 부모님과 함께 가산의 아울렛으로 나를 데려갔다. 여러 매장을 오가다가 정장과 셔츠, 구두, 벨트, 정장만으로는 추울 거라며 검은색 투 버튼 코트까지 한 번에 구입하게 되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는 정신적인 소모와 지출에 대해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결혼하는 누나에게 해준 것도 전혀 없으면서 전적으로 받는 것이 미안하기만 했다. 


이 정장은 클래식한 스타일이라 출퇴근용으로 입기는 어려웠다. 회사에 취업하고 나서는 새로 맞춘 캐주얼한 정장을 주로 입게 되었다. 누나의 선물은 11월 13일, 가수 김민우의 '사랑일 뿐야'가 축가로 불리던 그곳에서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소임을 멋들어지게 해냈다. 그날 이후로 세탁소에 맡겨지고 옷비닐에 씌인 상태로 한 번의 이사를 거쳐 지금의 자리에 걸리게 되었다.


 #2. 직접 고른 고가의 외투

  

대학교에 복학하며 내 관심은 외모에 쏠렸다. 키가 큰 편이지만 키높이 깔창을 깔고 다녔을 정도로 타인을 의식하는 편이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관심을 얻고 싶은 욕구가 컸던 만큼 옷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엄마가 사다 주거나 누나가 물려주는 옷을 입었다. 나의 고유한 의지로 옷을 구입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학생들이 즐겨 입는다는 상호명을 중심으로 옷을 찾아보다가 한 외투를 우연히 발견했다. 카라가 세워져 있는 갈색 야상이었다.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가격이었다. 당시 16만원 정도 가격에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는 그만한 돈이 수중에 없었고, 사려면 부모님께 말해야 했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고 눈여겨보다가 생전 처음으로 엄마에게 옷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가격을 말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말을 짐짓 늘리다가 이윽고 꺼냈는데 엄마는 흔쾌히 사준다고 대답했다.


그 야상을 일 년 남짓 입고 다녔다. 하도 입어서 카라에 때가 끼고, 찢어진 부위가 생겨 수선을 맡긴 적도 있다. 이 외투는 복학생으로 대학교에 적응하는 시기에, 여자친구와 처음 만났을 때에, 친구들과 종로에서 어울리던 시절에, 이 시절 여느 사진 속 어떤 상황에서나 나와 고락을 함께 했다. 이후로는 유행이 바뀌기도 했고, 옷이 낡으면서 입지 않게 되었다. 첫 정장과 마찬가지로 한 번의 이사를 거쳐 옷장 속으로 나란히 걸리게 되었다. 


이외에도 여자친구와 함께 맞춘 핑크색 체크 남방, 소매에 생긴 구멍이 커져 언제부턴가 입지 않은 10년 지기 후드 집업처럼 좀처럼 입지 않는 옷들이 옷장에 방치되어 있었다. 꺼낸 옷들을 하나씩 살펴보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사연이 있는 옷을 잘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단옷뿐만이 아니다. 이야기가 묻은 물건은 쌓아두는 편이다. 여자친구에게 첫 생일선물로 받은 에세이는 더 이상 펼쳐 볼 수 없을 정도로 낡았지만, 책장 한 곳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신발장에는 10년도 더 된 첫 커플 신발이 언제라도 신길 자세로 대기하고 있다. 이처럼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더없이 소중했던 삶의 순간들을 보관하도록 돕는 앨범 같은 존재들이다.


두 번째는 비싼 돈을 주고 산 옷은 잘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쌈의 기준은 시기마다 다르다. 대학생 때는 5만 원만 넘어도 비싼 옷이었고, 현재는 10만 원 근처만 가면 마우스 커서가 쉽게 멈추지 않는다. 나는 '실수하는 나'를 용납하지 못하는 편이다. 특히 실수를 저지른 상황 뒤에 따라오는 부모님의 조언, 나에게는 불호령 같은 반응이 내면에 자리 잡아 실수를 실패로 인식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경향은 사소한 미끄러짐을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상황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하며 고통을 유발한다. 구입한 옷이 모종의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고 가격마저 비싸다면 더 심사숙고하지 못한 스스로를 비난한다. 옷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가능한 만큼 따져보았다 해도 구입한 자신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환불을 받지 않았던 몇몇 옷들은 정해진 수순처럼 나에게 외면받고 옷장에서 기나긴 유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준호에게서 집착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스님이 집착은 뜨거운 차가 든 찻잔을 들고 있는 것과 같다고 설명해 준 적이 있다고 했다. 열기가 치솟는 찻잔을 계속 들고 있으므로 괴롭지만, 그 찻잔을 놓지 못하는 상태가 끊임없이 고통을 유발한다고 했다. 나는 '찻잔을 놓지 못할까?' 생각했다. 이유는 저마다 다를 같았다. 누군가는 언젠가 차를 마시겠다고 생각했을 있고, 누군가는 찻잔이 매력적이라 한시라도 내려놓고 싶지 않았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찻잔을 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손목으로 전해지는 무게감이나 손등으로 느껴지는 열기로 고통스러울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찻잔이라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찻잔을 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으로 찻잔을 살펴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기도 하고, 코로 차의 향을 맡아보기도 하고, 입으로 맛을 음미해 보는 등 온 감각을 동원하여 친절하게 관찰하고 기꺼이 체험해 보아야 비로소 찻잔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했다. 


과거의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릴 만한 물건이 없더라도, 그때의 경험은 나의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현재의 삶을 만족스럽게 살아가도록 행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외부에서 발견하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 숨 쉬는 내내 여운 짙었던 순간들이 의도적으로 만족할 만한 행동을 선택하도록 이끌 것이다.

또한 실패가 아니라 실수로 잘못 산 옷들은 마주하게 된 몇몇 결점들로 외면해 왔다. 인터넷으로 옷을 처음 사기 시작하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흔한 실수였다. 여전히 옷을 살 때면 실수하고는 하지만, 횟수가 적어진 것을 보면 옷장에 알록달록하게 쌓인 옷들이 준 배움의 가치로는 충분하다. 


두 평 남짓한 나의 보금자리는 이사를 처음 올 때만큼이나 쾌적하다. 물건을 향한 집착으로부터 홀연히, 무엇으로도 구태여 채우려 애쓰지 않고 비어있는 그대로 놓아 두니 한결 편안하다. 쌓아두거나 정리하는 일은 우리의 삶과 닮았다. 채워 본 사람이 채워진 상태의 고통을 알고, 비워 본 사람이 비워진 상태의 기쁨을 안다. 줄곧 고통스러웠으나 한층 필요한 물건들로 채워진 방에 머무르며 나는 기쁨을 만끽해 본다.  


Image by Steve Adcock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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