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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ug 11. 2024

한결같은 다정함이 다가왔을 때

  "오, 선생님. 하핫, 오랜만이에요~"

  마주 앉은 수진에게 나는 인사했다. 

  "네~ 오랜만이에요.

  수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암동의 어느 한적한 카페. 평일 낮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알리듯 카페 내부는 여유로웠다. 그간 잘 지냈냐는, 이어지는 수진의 물음에 나는 나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네, 제가 또 의외로 건강하지 않겠어요? 하하... 하.."

  "예.. 그럼요. 제가 아주 잘 알지요~"

  수진은 '쟤 또 시작이네'라는 듯한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물론, 말투는 여전히 친절했다. 


  수진을 만나면 나는 우스갯소리를 자주 꺼낸다. 시답잖은 농담에도 대꾸해 주는 수진이 편해서일까. 종이인형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수진에게 나는 되지도 않는 건강인임을 강조하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내가 수진을 처음 만난 건, 대학 상담센터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때다. '4번방'이라 불리던 상담실에서 인턴 상담원을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됐었다. 그 자리에서 나와 마주 앉은 수진의 이름과 모습을 처음으로 맞추어 보았다. 그의 곧은 자세와 세련된 복장, 똑 부러지는 말투는 어딘가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수진과 인턴으로 근무하는 기간이 늘어갈수록 나는 수진이 우리 누나와 닮은 구석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누나는 일찍이 독립적으로 성장했다. 그 성장세가 대단하여 가족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도 부모님의 말보다 누나의 입김이 언제부턴가 세게 작용했다. 내가 서른 살에 우리 가족이 이사를 간 적이 한 번 있다. 홍은동 안에서 교통편이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부모님은 몇 년 사이 오른 집값에 감탄하며 "그때 네 얘기 안 들었으면 어쩔 뻔했어"를 잊을만하면 꺼낸다. 

  부모님은 원래 이사에 결사반대를 했다. 이전 집이 고향과 같다며 추억을 어떻게 고작 입지와 맞바꿀 수 있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포기를 몰랐다. 누나의 꾸준한 설득은 결국 이사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원래 살던 집보다 여러 면에서 편리한 집들을 누나는 부모님께 부단히 보여주었다. 누나의 멈추지 않던 날갯짓이 결국은 부모님의 생각마저 바꾸어 놓게 된 것이다. 


  돌풍에 가까운 누나의 파급력은 일순간 만들어진 건 아니다. 부모님의 그림자에 기안한 불안도 누나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누나는 스스로 필요하다고 인식하면 부모님의 태클마저 뛰어넘으며 도전하고, 이겨내고, 성취했다. 이런 누나가 내게는 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나의 생각을 물어봐 주는 건 누나 밖에 없었다. 물론, 넉넉지 못한 가족의 지원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느라 나와 대화하는 횟수는 절대적으로 적었다. 그럼에도 만 원씩 용돈을 챙겨 준다든지, 퇴근하는 길에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때때로 전화했다. 

  게으름을 불이거나 예민하게 행동하면 부모님을 대신하여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지적하는 누나의 어투에 "어.. 어.. 알겠어.." 하며 건성으로 듣는 시늉을 하다가도 누나의 눈매가 매섭게 변할 때면 목소리가 여전히 잦게 떨리기도 한다. 


  누나가 성장하며 키워간 '강인함'이 나는 부러웠다. 이 강인함은 자율성에서 비롯되었다. 자기 스스로 원하는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힘이 누나는 강했다. 대학도, 독립도, 결혼도, 출산도, 생각나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을 나열해 보면 누나는 언제나 누나가 원하는 대로 했다.  

  그러나 누나가 그간 살아오며 오롯이 자기만 생각했다고 보긴 어렵다. 누나는 집안의 사정을 누구보다 세심하게 살폈다. 누나는 자신이 포기해야 할 것들을 빠르게 받아들였고,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정리하며 올곧게 이루어갔다.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유독 불편하게 느껴지는 대상이 생긴다. 불편함을 주는 대상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러나 가지고 싶은 특정한 면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누나의 자율성이라는 열매가 탐이 났고, 자신의 일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나에게 대입하며 조언하는 누나의 언어가 좌절스러울 때가 많았다.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어, 수호샘도 오늘 야근하시나요?"

  우리는 노동의 대가로 상담 수련을 받는 인턴이었다. 급여는 물론 없었다. 직장 생활을 이어가며 모아두었던 돈이 지출 내역으로 고스란히 쌓여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건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심리상담사가 되기 위한 여러 방법 중에 대학교 인턴 과정은 체계적이면서도 안정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수진과 나는 '인턴'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상담자였지만, 일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직원 못지않았다. 이날도 나는 누구도 시키지 않은 야근을 자처하며 잔업과 씨름하고 있었고, 샅바를 움켜쥐다 이리저리 골몰하던 내게 나란히 앉아 있던 수진이 말을 걸어왔다.  

  "네, 아직 정리 못 한 게 좀 있어서요. 수진샘도 야근하시나요?"

  "네.. 업무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하느라.. 숙제하듯 자주 남아서 마무리하게 되네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오늘 결심하고 남았네요. 그런데 샘, 혹시 배고프지 않아요?"

  수진에게서 나온 뜻밖의 물음에 나는 어쩐지 숨을 고르기도 전에 대답을 질러버렸다.

  "네, 배고파요. 샘도 배고프세요?"

  "네, 저도 배고픈데 우리 뭐 시켜 먹을까요?"

  수진의 제안으로 그날 우리는 햄버거 세트를 시켜 먹었다. 별도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 선생님 것을 포함하여 큼지막한 햄버가와 따끈한 감자튀김, 얼음으로 자박한 콜라가 센터로 이내 도착했다.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각자의 컴퓨터를 앞에 두고 햄버거를 먹었다. 시선은 모니터로, 감자튀김으로, 햄버거로, 수진에게로 고루 향했다. 그러면서 '입가에 햄버거 양념이 묻지는 않았을까?' '입을 크게 벌리는 모습이 모나 보이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대화는 상담 수련에서 개인적인 주제로 옮겨갔다. 수진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다. 내가 느끼기로 그의 남동생은 나와 닮은 면이 많았다. 직업으로 삼고 싶은 일을 찾던 과정이나 사회 경험이 더 필요하다는 부분을 포함하여 들으면 들을수록 나를 연상하게 했다. 수진은 남동생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답답한 듯한 수진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이때 누나를 문득 떠올렸다. 나는 내가 느낀다고 인식하는 수진의 마음이 '우리 누나가 이런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점차 깨달았다. 

  수진은 때때로 현실적인 조언을 동생에게 꺼내기도 하는데 효과는 미미하다고 했다. 나는 수진의 마음을 알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으로 동생의 입장에서 수진의 말을 소화했다. 그랬다. 누나도 인간적으로 비난하기 위해 내게 조언하지 않았다. 나보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나고 세상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몸으로 먼저 부딪쳐보며 알게 된 지혜들로 내가 보다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테다. 

  돌아보면, 누나의 조언은 내비게이션과 유사했다. '살아감'이라는 목적지로 나아가는 데 스스로 생각하는 최선의 경로를 알려줄 뿐, 억지로 따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제안한 길로 다만 나아가기를 강조했을 뿐이다. 누나가 하는 조언에 내가 건성으로 대답하며 따르기 싫어했던 이유는 결국 회피하려고만 하는 인생의 갈림길로 누나가 나를 끄집어 데려다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누나의 조언으로 기어코 선택을 거듭해왔다. 대학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첫 직장에 입사하게 된 것도, 군대를 무사히 다녀온 것도. 이외에도 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누나가 내게 심어준 자율성이라는 씨앗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도록 도왔다. 살아나게 했다. 살아가게 했다. 


  어느새 눅눅해진 감자튀김을 정리하며 우리는 각자 하던 업무를 마무리했다. 집으로 돌아와 음악을 들으며 쉬고 있을 때 수진이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다. 글자들이 살아 숨쉬는 듯한 그의 다정한 문장들을 읽으며 별안간 새로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걸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나를, 나조차 스스로 관심을 두지 않는 나를 다정하게 대하는데 이 정도면 솔직한 마음을 내비쳐도 안전하지 않을까?'


  견고하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는 걸 느꼈다. 작게 열린 문틈으로 삶으로 향하는 에너지가 흘러나왔다. 그간 사람들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삶의 균열에 희망이 돋아났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 햇살이 대지를 고르게 적시는 평화로운 날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하듯 단절되었던 세상과 내가 연결되는 극적인 경험이었다. 

  이날 이후로 나는 사람들에게 나로서 다가가는 게 수월해졌다. 몸이 왜소하다는 종이인형이라는 장난도 애칭으로 받아들였다. 빅맥처럼 두터운 햄버거도 제법 크게 베어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 나를 어떤 사람으로 정의하는가이다. 물론,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고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단서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평가가 나를 결정짓지는 못한다. 내가 하는 생각과 말, 행동이 차곡차곡 쌓여 나를 만든다. 나라고 일컬어지는, 드러나는 여러 모습에서 내가 바라보는 나가 배제될 수 없다. '강인하지 못한 나'에서 '강인하게 되어가는 나'로 스스로 정의내리는 순간, 내가 해내지 못할 일은 없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두 사람의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수진과는 인턴 수료 이후로도 꾸준히 만났다. 인턴 근무를 했던 센터에서 일 년 가까이 직원으로도 함께 근무했기 때문이다. 인턴부터 직원으로 근무하던 시절까지 겪은 우여곡절이 참으로 많았지만, 수진과 나누며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다. 수진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친구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그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수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나는 누나와도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질투와 동경을 유발하던 내면의 누나와 나는 스스로 화해해 갔다. 누나를 향한 쑥스러운 동생의 마음은 줄곧 조카들에게 향한다. 조카들은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삼촌을 찾는다. 어제도 집으로 놀러 오기로 약속한 삼촌을 모시러 10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찾아왔다. 해맑게 웃으며 "따끼"를 조카들이 외치면 나 또한 마음으로 반긴다. 그 누구도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사진으로나마 알고 있는 그 미소가 조카들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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