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에게 필요했던 건, 안전기지 하나였는데

by 두근거림

바가지 머리를 한 코흘리개 소년이 있다. 그는 유치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손가락이 야무지게 생겼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던 그는 흐름에 맞추어 건반을 두드리는 게 버거웠다. 유치원에서는 한 해의 마무리로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간단한 악보로 바꿔서 무대에 오르자고 했다. 그는 공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 대답했다.


검정색 정장에 나비 넥타이를 하고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그가 단상에 올랐다. 객석에는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피아노가 놓인 공간에 햇빛 같은 조명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머지를 감싼 어두움과 대비되는 밝기였다.


피아노로 곧장 걸어갔다. 의자에 앉았다. 적막이 감돌았다. 콩닥거리는 소리가 오직 들렸다. 손끝이 떨렸다. 눈앞에 악보가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떨구었다. 건반을 쳐다보았다. 계이름을 생각하며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미미파솔 솔파미레 도도레미미레레-'


piano-349928_1920.jpg Image by PublicDomainArchive from Pixabay


손가락이 멈추었다.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소년은 조명 아래에 서서, 관객들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관객의 호응은 그가 무대 뒤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졌다. 소년은 아마도 옹알이, 뒤집기, 앉기, 기어가기, 서기, 말하기, 걷기 이후로, 자신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수호는 꿈이 뭐예요?" 소년은 수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유치원에서는 시기마다 꿈이 뭔지 물었다. 원생들은 '나는 나는, 나는 나는 ~가 될 거야'라는 문장과 음율에 맞추어 돌아가며 발표했다. 수호는 경찰이 될 거라고 했다. 어떤 날에는 군인이, 또 하루는 소방관이 될 거라고 했다. 수호는 우주특공대 바이오맨이나 울트라맨처럼 악당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만화에 빠져있었다. 빨간색, 가운데, 1번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놀 때면 주인공을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수호는 좀처럼 빨간색을 맡고 싶다고, 가운데에 서고 싶다고, 1번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수호가 자신의 세계를 지키며 박수와 환호를 받기에는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약점이 존재했다.


소년에게는 한 번의 연주나 그럴싸한 꿈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호에게는 기지가 필요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과 후로 불안하고 긴장되었던 마음을 내놓을 수 있는, 전투로 생긴 상처와 지친 몸이 쉴 수 있는 안전 기지가 필요했다. 연주가 늘 성공적일 순 없고, 전투가 항상 승리로 이어질 순 없다. 안전 기지는 성패와 관계없이 언제든, 원할 때면 떠올릴 수 있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천 년도 넘은 고목이 있고, 빼곡한 가지가 있고, 풍성한 잎이 있다. 강한 조명에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다. 악보와 다르게 연주해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주인공이 되어도, 되지 못해도 새의 노랫소리가 슬며시 들려온다.


수호에게는 자기 자신을 믿어도 괜찮다고 알려주는 한 사람이 필요했다. 긴장과 불안, 슬픔이 삶의 일부라고 말해주며 품을 내어 줄 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시도해 가는 과정이 대견하고, 수호가 무엇이 되든, 어떻게 하든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줄 거라고 믿음을 주는 단 한 사람이 필요했다.


수호는 자신을 믿어주는 대상으로부터 자기를 믿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수호에게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감정들이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소외시켰을 테다. 또한, 수호의 욕구와 소망은 자신에 의해서 외면 받았을 테다. 사람들의 호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타인이 좋아할 만한 것을 선택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 배웠기 때문이다.


"수호는 존댓말을 잘 쓰네. 의젓하구나"

"수호는 어른들 말씀을 잘 따르네. 예의가 바르구나"

"수호는 양보도 잘하고 친절하네. 친구들이 좋아하겠구나"


수호는 타인을 향한 행동으로 칭찬을 받았다. 자기 자신으로 빛나본 적이 드물다. 내가 기억하는 한,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하던 그때가 유일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이마저도 행동으로 반짝였던 순간이다.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로 축복이고, 존재만으로 사랑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기적처럼 나타날 지도 모르는 안전 기지를 기다리며, 기대하며 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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