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성장하면 명절마다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바로, 덕담 시간이다. 덕담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며 서로 나누는 좋은 말이라고 한다. 뜻을 곱씹다 보면 나이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덕담은 웃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잔소리하는 시간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삶의 단계마다 어른들에게 답해야 하는 질문이 있고, 그 순간은 대체로 기분이 나빠진다는 특징이 있다.
돌아보면, 중학생 때까지는 학교 성적에 대해 궁금해한다. 친구는 잘 사귀고 있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취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자신들의 기준보다 점수가 높으면 감탄한다. 낮으면 침묵이 돈다. 참견이 이어진다. '공부를 도와줄 것도 아니고,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왜 물어보는 걸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설날에는 세뱃돈이라는 보상이 따르니 감수하고 들을 수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어느 대학을 목표로 하는지 물어본다. 대학생이 되면 어디로 취업할 건지, 어떤 일을 할 건지 물어본다. 얼떨결에 직업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면 언제 결혼할 건지, 애는 낳을 건지 알고 싶어 한다.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그럴싸한 대답을 해야만 하는, 사촌 동생들이 지켜보는 나의 가족 청문회는 현재 결혼에 머물러 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 어른들은 결혼에 대해 물었다. 그것도 집요하게. 특히, 부모님과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만 했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부담스럽다. 결혼식을 올리는 친구나 후배를 보면 눈물이 차오른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연인으로 지내 온 과정을 사진으로 편집한 영상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결혼식장에서 보는 신부, 신랑의 모습과 박수 치는 하객들을 보면 그야말로 축복이 감도는 듯하다. 다만 나는 가족과 지인에게 부부로써 삶의 시작을 알리고 축하받는 결혼식부터 어렵게 느껴진다. 내가 신랑이 된다고 상상하면 곤란하고 쑥스럽기만 하다.
혼인신고를 한다는 게 두렵기도 하다. 혼인신고는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부부로써 인정받는 과정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조차 불안정감을 느끼는 내가 남편으로 역할과 의무를 다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나는 주말마다 배짱이가 된다. 일요일에는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평일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면 러닝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산책을 하며 해소해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되면 일상의 많은 시간을 배우자와 맞추어 보내야 할 것 같다. 주말에도 때때로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에 제한이 생길지 모른다.
결혼 생활을 경험해보지 않았으므로 이는 편견일 가능성이 높다. 예상과 다르게 배우자가 나만의 시간을 존중해 주거나, 오히려 배우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생각해 보건대 나의 성향이나 취향, 결점마저도 이해해 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만족감을 크게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사회에서 부여받은 역할에서 벗어나, 집이라는 울타리로 돌아갔을 때부터는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며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그런데 결혼은 단순히 내가 이해받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다들 하니까, 어른들이 하라고 했다고 결혼 날짜를 잡는 건 더욱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결혼에 대한 부모님의 의지는 확고하다. 부모님과 나눈 삼십 대의 대화가 대부분 결혼으로 이어졌다. 정확하게는 부모님의 일방적인 설득이다. 아빠는 엄마보다 내가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이 커 보였다. 아빠는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첫 째 형은 어려서 머리를 크게 다쳤고, 성인이 될 때까지 방 안에서 누워서 지내다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장남의 역할을 맡게 된 아빠가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당시 술과 노름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 혼자서 남편과 다섯 명의 자녀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채소를 떼다가 시장에서 팔던 할머니를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려운 형편을 위해 네가 거들어야 한다며 불 같이 소리치는 할아버지를 겪어왔을 것이다. 자라나는 동생들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 할아버지, 그 사이에서 가족들을 위해 부단히 살아내야 했을 할머니가 마음에 내내 남았을 것이다. 고모는 고모부를 만나 일찍 결혼했다. 두 삼촌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을 일구었다. 아빠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학업을 포기하고 할머니를 도왔다. 희미한 꿈이라도 삼켜야만 했다.
온갖 고초를 겪은 할머니는 손때가 묻은 돈마저 탕진하는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좋아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할아버지로 인해 엄마의 희생을 경험하고, 큰 아들로서 자신의 젊음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고모가 결혼할 때까지, 두 삼촌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빠와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의 자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십여 년 전에 호국원에 안장되었다. 아빠는 명절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러니까 아빠와 엄마를 만나러 간다. 그곳에 가면 두 분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할아버지도 물론 자기만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1920년대에 태어나 어떤 일들을 겪어왔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빠는 다만 가정으로부터 '아이를 낳게 되면 나와 같은 고생을 절대로 겪게 하지 않을 거야' 같은 생각을 형성해 나간 것 같다. 고생을 모르게 자녀를 키우고 싶다던 아빠의 신념은 덕담은 물론이거니와 간단한 대화조차 생략하게 했다. 아빠는 할아버지로부터 간섭을 받았고, 나는 아빠로부터 방관을 얻었다.
엄마와 결혼하며 두 자녀를 낳고 살던 아빠의 삶은 순탄치 않았을 것 같다. 한 회사에서 20년 가까이 근속하다가 명예퇴직을 겪고, 두 번의 창업을 했다가 폐업하는 과정을 거치며 아빠는 인생이 버겁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고모와 두 삼촌이 결혼할 때까지 한 집에서 챙겨야 했다. 할아버지가 가족들을 향해 감정을 발산한 것과 다르게 아빠는 마음에 담아두고 삭히는 방법을 선택한 것 같다. 아빠가 사회에서 경험하는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나와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자녀가 고통에 다가가도록 스스로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소중해서, 누구라도 들었을 법한 학교 성적에 대한 어떠한 말도 나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결혼은 달랐다. 아빠는 내 주변을 쫓아다녔다. 때로는 아빠가 나타나면 모기가 날갯짓을 하는 착각마저 들만큼 집요했다. 그만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다. 그나마도 말로 전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가끔이나마 결혼이라는 주제로 우리 부자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데는 내가 '아빠'라는 내면의 대상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