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물들이기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엄마와의 늦은 화해

by 마리스텔라

내 나이 마흔 살이었던 즈음지도

어처구니없게도

엄마의 흰머리를 보는 것이 싫다.

당시 엄마의 나이는 60세 중반이었고

나이 자체를 생각할 때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많은 여성들이 할머니란 말을 들을 나이이기도 했다.


나는 이미 결혼도 해서 아이도 있는 나이였음에도 엄마에게 양가감정이 있었다.

장녀인 난 부모에게 효녀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맏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상처와 관련한 최초의 기억은 세 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의 사고로 나는 외가에서 삼 년을 지냈다는 걸 알았다.

동생이 태어나서 3일 되어 일어난 사고로 엄마는 나를 양육할 형편이 아니었다.

신생아인 동생도 키워야 하고 산후조리는커녕 아버지 간호도 꽤 오랜 시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가에서 세심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럼에도 분리불안과 엄마에게 받을 보살핌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집에도 언제든 원하면 가기도 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어떤 때는 엄마를 보자마자 외갓집으로 가겠다고 한 일이 자주 있었다고 했다.

어떤 특별한 상처가 될만한 일이 기억되는 것도 아니고 있지도 않았다고 알고 있었다.

성장과정 중 있었던 어린 시절의 단면은 그렇게 묻혀있었다.

나는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깊이 부정적으로 각인된 맘속의 어린아이는 때때로 나를 괴롭혔다.

왜 그런지 엄마가 나이 들어가는 것도 아픈 것도 모두 싫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상황을 속이 상하다고 표현할 것인데 난 싫다고 감정을 표현했다.

엄마와 어린아이 시절의 나는 화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건 서른 중반 즈음 표면으로 드러났다.

그때의 상처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는 그 당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야기하셨다.

나 또한 이해한다고 했지만 완전한 감정의 회복은 되지 않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거의 십 년이 지날 때까지 이어졌다.

가끔은 늙어가시는 엄마를 보면서 안쓰러웠다.

지금 나는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다.

최근 퇴직을 했지만 직장인이었을 때는 흰머리를 보이는 것이 싫어 염색을 했다.

염색의 유지기간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희끗희끗 보이기 시작하면 최대한 버티고 있다가 행사처럼 흰머리 물들이기를 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염색을 한건

퇴직축하 행사 직전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최대한 젊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다는 단순한 심정이었다.

지금은 늘어난 흰머리를 보더라도 그냥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내겐 놀라운 변화이다.

왜 그때 엄마의 흰머리를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없었던 걸까.

나는 결코 늙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젠 연로해지신 엄마의 머리는 곱게 빛나는 예쁜 은발이다.

지금의 나는 빨리 엄마처럼 예쁜 은발이 되길 기다리고 있다.

엄마와의 진정한 화해가 좀 더 빨리 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엄마가 지병이 있어 고생은 하시지만 지금처럼만 오래 계셔주시기만 간절히 바란다.

어리석게도 일찍 엄마를 진정으로 따뜻하게 대하지 않고 착한 딸 증후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이 있음을 고백하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야겠다.

지금도 엄마는 부족한 나를 보실 때마다 따뜻하게 안아주신다.

너무도 예쁜 엄마의 은발이 주름진 얼굴을 환하게 밝혀주고 내 눈에서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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