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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eek Nov 01. 2020

No Justice, No Peace

LA 폭동

3집: 갱스터 랩은 힙합 정신을 망쳤을까

17. No Justice, No Peace


미국 사회가 갱스터 랩을 거부했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폭력성이었다. 갱단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그런데 갱스터 랩은 끊임없이 반대의 질문을 던져왔다. '경찰과 우리 중 진짜 갱은 누구인가?' N.W.A가 <Fuck Tha Police>로 체포될 당시, 경찰은 미리부터 공연장에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조직적으로 흑인을 탄압하는 경찰의 모습은 때때로 진짜 갱단보다 더 갱단 같았다. '로드니 킹 사건'은 이런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로드니 킹은 강도와 폭행의 전과가 있었고 과속으로 체포될 당시에도 경찰에게 먼저 폭력을 가하는 등 명백한 범죄자였다. 하지만 경찰의 구타 장면은 그것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잔인했다. 이미 바닥에 널브러져 반항은커녕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음에도, 경찰들은 그를 둘러싸고 진압봉으로 끊임없이 가격했다.1) 영상이 공개되자 흑인사회의 비판이 거세게 이어졌다. 이듬해인 1992년 폭행에 가담한 네 명의 경찰관들이 법정에 섰다.


로드니 킹 사건 당시의 화면


평결은 짐작하듯 무죄였다. 흑인 사회는 이 결과에 절대로 승복할 수 없었다. 재판의 과정이 짜인 각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공정한 배심원 선별을 이유로 재판 장소를 '시미밸리(Simi Valley)'라는 LA 외곽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곳은 거주자의 88%가 백인이고 흑인은 1.5%에 불과하며, 다수의 경찰관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단 12명의 구성에는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 1명의 아시아인뿐이었고 흑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건을 기소한 검찰만이 유일한 흑인이었다.


'No Justice, No Peace' 흑인 사회가 내세운 구호의 뜻은 명확했다. 정의가 없는 곳에는 평화도 필요 없다. 평결이 발표된 1992년 4월 29일을 기점으로 LA에서 약 6일간의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법원을 비롯한 관공서가 불타고 파괴됐다. 약탈과 방화는 물론, 총격이 오가기도 했다. 60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고, 2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피해 추정치는 수억 달러에 달했다. 정부에서는 군 병력을 대거 투입시키고 나서야 폭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는 또 한 번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다. 그와 더불어 갱스터 랩에 대한 인식도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다. 폭동의 양상이 갱스터 랩이 경고한 그대로였기 때문에, 갱스터 랩을 두고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말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인종차별의 이슈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처럼, 한두 번의 사건이 모든 것을 드라마틱하게 바꿔주지는 못한다. 이해의 여지가 생겼을 뿐, 문화 자체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폭동만큼이나 문화적인 혁신이 필요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The Chronic>>이었다.




1) 총 56대를 가격당했고, 뇌진탕에 걸렸다. 구타 영상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사건 당시 로드니 킹을 '정글 속 고릴라', '도마뱀'으로 묘사하는 경찰들의 무전이 추가로 공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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