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가게들을 지나다 보면, 쇼윈도 너머 꽃밭을 연상케 하는 파스텔 칼라의 옷을 입은 마네킹이 보인다. 그 화려한 색은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설렘을 주면서 내 옷장의 검은색 옷들에게 도발을 해온다. 다소 눈에 띈다 싶은 색들의 옷은 맵시를 뽐내 볼 겨를도 없이 피팅룸 거울 앞에서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다시 옷걸이에 걸리고 만다. 그날의 승자는 역시나 검은색 옷이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검은색이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왜일까? 특히, 옷가게를 다녀올 때는 쇼핑백 안은 검은색 투성이다. 마치 검은색 마술에 걸린 듯하다.
나는 검은색을 자주 입는다. 익숙하니 불편하지 않다. 다른 색상들은 좀 어색하고 입는다 해도 오래 입지를 못한다. 가볍게 친구를 만나거나, 중요한 약속이 있거나 또는 운동을 하러 갈 때도 선택은 하나다. 검은색이다. 탁하지만 이 색이 뿜어내는 매력은 누구나 알고 있다.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그리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날씬해 보이기까지 하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설령 예외적으로 다른 색상들의 옷을 고른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내 옷장의 메인 옷걸이를 차지하지 못한 채 둘둘 말려 굴러 다니다 결국 빛을 보지 못하고 재활용센터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햇살이 눈부시던 어느 날 오후, 창문밖에 시커먼 커다란 장막이 드리워진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비가 오려나 하고 자세히 보니. 빨랫대에 널어진 내 옷들이었다. 티셔츠며 바지며 그리고 양말까지 모두 다 검은색의 행렬이었다. 나의 습관이 고스란히 마당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수많은 색들을 외면한 채 내가 골랐던 그 검은색 옷더미가 오늘따라 칙칙하고 지루해 보였다. 검은색은 고민 없는 자만으로 선택되었고 어느새 나의 고집처럼 내 인생의 색깔로 정착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이 아름다운 계절을 닮은 색들도 많고 많은데 말이다.
아지랑이 피는 봄날은 파스텔빛 도는 민트색 블라우스,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선 강렬한 오렌지색 스커트, 낙엽 뒹구는 늦가을엔 코발트색 코로듀이 바지, 흰 눈 쌓인 하얀 겨울에는 빨간색 니트가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다. 검은색에 가려져 잊고 있었던 색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서서히 잊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쩜 내 인생도 편협한 하나의 방식으로만 대했던 건 아닌가 궁금해졌다. 유연하게 삶을 끌고 나가며 인생에 툭 튀어나오는 도전이 있다면 이젠 미소로 받아들이고 싶다.
검은색만 고집하던 나의 과거에서 이제 탈출하려고 한다. 나를 길들여왔던 그 검은색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내 인생에 예쁜 팔레트 색을 담아 주리라!
사진출처: 핀터레스트/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