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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딩턴 Dec 31. 2020

소울푸드가 돌아왔다

한국을 떠나 이곳에 십 년을 넘게 사는 동안 힘이 빠지거나 뭔가 얼큰하고 뜨끈한 게 먹고 싶을 때 찾아가는 곳이 있다. 해장국집이 아닌 바로 말레이지안 식당이다. 더운 말레이시아와 국물요리는 뭔가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되지만 그런 편견은 당당히 깨버린 채 우리 가족의 단골 식당이 되어버렸다.


내가 밥집을 고르는 기준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누구나 가고 줄 서는 맛집에 다녀봤지만, 대개는 실망감이 컸다. 일단 기대감이 크다 보니 맛을 평가하는 기준이 까다로워지고 게다가 그런 맛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다. 줄을 한참 서서 지치거나, 먹는 동안에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음식에 집중하기 힘들고 허둥지둥 쫓기는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7년 전 겨울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이른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으레 지나다니던 식당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허름하게 보이는 식당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커다란 그릇에 담긴 뜨근한 누들숩을 먹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아시안 분위기의 국수가게였다. 그냥 지나치려 하다가 호기심이 발동한 남편을 따라갔다.


허름한 입구를 들어가니 부드러운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즈를 트는 국숫집은 처음 보았다. 뭔가 신선하고 분위기가 온화했다. 주방 앞에는  여러 음료가 진열되어 있는 바가 있고 횟빛으로 칠해놓은 벽이 이국적인 느낌이 났다. 우리는 메뉴판을 둘러보고선 그 식당의 시그너쳐인  피쉬헤드숩을 주문했다. 생선 머리가 들어간 누들 숩을 용기 있게 선택해 놓고 어떤 맛일까 궁금하고 있는 찰나에 커다란 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여졌다. 약간 새콤하면서 매운맛이 살짝 도는 똠얌베이스의 국물에 얇은 국수와 바삭하게 튀긴 생선 머리가 툭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고수와 빨간 고추 그리고 토마토 몇 조각이 얹어있었다. 숟가락으로 국물 한번 떠먹으니, 와!!! 내가 이걸 먹기 위해서 그 수많은 중국 누들들을 먹어봤나 싶을 정도로 감동하였다. 똠얌이 내는 개운한 국물 맛에 잘 튀겨진 바삭한 생선이 하얀 살을 숨기고 있었다. 게다가 생선살을 발라먹는 먹는 재미가 쏠쏠한 음식이다. 별로 조화롭지 않은 재료들이 잘 어우러져 나름 고급스럽고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매력을 느꼈다.

사진설명: 튀긴 생선 머리와 얇은 면이 똠얌국물에 퐁당 빠져있다


올해 코로나 때문에 그 식당은 한참 문을 닫아걸었다가 잠시 열게 되었는데 그때  방문한 게 마지막이었다.  한국말로 인사를 하며 밝은 얼굴의 직원 켈시와 글로리아도 그곳에 여전히 있었다. 친절한 켈시는 우리에게 피쉬헤드숩을 가져다주면서 담주에 완전히 문을 닫는다며 아쉽게 얘기했다. 이렇게 잘 되는 식당도 코로나 여파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게 속상했다. 마음에 맞는 식당 만나기 쉽지 않고 게다가 이런 소울 음식을 찾아내기는 더더욱 힘든걸 알기에 나도 모르게 힘이 빠졌다. 이제 추억 속으로 남겨진다 생각하니 식당을 나서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그 후로 그곳을 지날 때마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가끔 우리 가족은 얘기했다. 그곳의 음식이 너무 그립고 밝은 분위기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따뜻한 직원들이 생각난다고... 그러던 중에 내 휴대폰으로 ‘띵동’하고 문자가 왔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들렸을 때 남긴 연락처를 찾아 나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식당을 다른 곳에서 열게 되었다는 연락이었다. 야호! 너무 반가운 소식에 당장 예약 문자를 보냈다.


아쉬워하던 찰나에 그리워하다 포기하면 가끔 신기하게 마술처럼 ‘짜잔’ 하고 나타날 때가 있듯이,  나의 그립던 소울푸드는 그렇게 돌아왔다. 어쩌면 그때의 허름한 식당이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 내 척박한 영혼을 촉촉이 적셔주었던 음식, 그 피쉬헤드숩은 그때 흘러나오던 재즈와 북적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따뜻한 인정이 모여 만든 추억의 한 그릇인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나만의 소울푸드를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감에 한창 설레어 그 맛을 더듬어본다. 재즈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식당외관 사진(문닫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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