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웰 다잉에 대하여>

[어똫게 살고, 그 끝에 대하여 질문하다]

by 박은아



<웰빙, 웰다잉 – 어떻게 살고, 그 끝에 대하여 질문하다>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면 내 호흡이 들린다. 그건 마치 내 삶의 가장 낮은 음처럼 깊고, 천천히 이어진다. 평일 아침마다 수영장에 나서는 것은 단지 건강을 위한 습관이 아니다. 그건 내 삶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매일 되묻는 일종의 의례다. 나는 나이 들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은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화요일과 목요일,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쿠아 운동을 한다. 물속에서 부력을 이용해 걷고, 웃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어머니의 팔이 조금 더 가볍게 움직이는 날, 나는 기쁜 눈빛으로 그걸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건 건강의 지표이자, 남은 시간을 더 나누고 싶다는 간절함이다.


근력운동도 시작하려한다. 단단한 몸을 원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다. 내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준비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 ‘웰빙’이자 ‘웰다잉’의 시작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가 죽는 순간이고, 또 한 번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때다.”


한 작가의 이 말처럼, 웰다잉은 단지 고통 없이 죽는 기술이 아니라, ‘기억될 삶’을 살아내는 예술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잘 사는 법’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잘 떠나는 법’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려한다. 그건 두려움이거나, 준비되지 않은 문제이거나, 혹은 문화적 억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바뀌고 있다. 세계 각국은 저속노화(slow aging), 존엄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호스피스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웰다잉을 사회적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영국은 이 분야에서 가장 선도적인 나라 중 하나다.


영국, ‘존엄하게 떠나는 권리’를 말하다-

웰다잉에 대해 가장 준비를 잘한 나라로 손꼽히는 영국은 1967년 세계 최초의 현대적 호스피스인 ‘세인트 크리스토퍼스 호스피스(St. Christopher’s Hospice)’를 설립하며 웰다잉 운동을 이끌어왔다. 이곳의 창립자, 시실리 손더스(Cicely Saunders)는 말한다.


“사람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도, 사랑받고 있으며 삶의 의미를 가질 자격이 있다.”


영국에서는 ‘Advance Care Planning’이라 불리는 사전의료계획이 보편화되어 있다. 환자가 의식을 잃기 전에 자신의 치료 방식을 결정하고, 법적 대리인을 지정할 수 있다. 단지 치료의 중단이 아니라,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한 과정이다.


2007년 유학을 갔던 스코클랜드에서 그곳 어르신과 대학생을 연결하던 제도가 참 인상적이라 여겨지면서 마음에 남았었다.

지금은 더 나아가 영국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Compassionate Communities(연민의 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있다. 웰빙과 웰다잉을 공동체의 문제로 삼아, 사람들 스스로 이 주제를 이야기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여기엔 죽음 준비 교육부터, 유언 쓰기, 장례 방식의 다양화, 사별 가족 지원까지 포함된다.


웰빙이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이라면, 웰다잉은 ‘어떻게 끝낼 것인가’의 질문이다. 영국은 이 둘을 떼어놓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같은 문장 안에 놓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이들의 문화적 깊이다.


우리는 그 얘기를 계속해서 꺼린다. 알고도 하지 않는 이야기, 피하게 되는 바로 그 이야기들.

우리 부모님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필요한 질문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 나와 부모님의 삶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 함께 가끔 식사를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엄마와 함께 물속을 걷고, 함께 웃고 얘기하며 계절을 보낸다.


부모님의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더 진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오늘의 강을 건너는 이 행위가, 언젠가의 마지막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될지를 나는 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자주 생각한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나는 어떤 기억을 함께 남기고 싶은가. 죽음이 우리 곁에 온다 해도 그것이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정점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맞이할 마지막 장면을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이며, 남은 시간을 더 뜨겁게 살아내려는 다짐이다.


문학이 말해주는 삶과 죽음이란?

토마스 칼라일은 말했다.

“진정한 삶이란, 죽음 앞에서조차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삶이다.”

그의 ‘쿠이보노’ 어떻게 살아야하나는 내 음반의 자작곡이자 주제이고 늘 나의 화두였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삶은 기억 속에 존재한다”고 말했고, 류시화는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일부”라고 썼다.


나는 이 문장들을 단순한 인용으로 쓰고 싶지 않다. 그것은 지금 내 일상의 일부이자, 매일 물속에서 만나는 내 마음의 떨림이기도 하다.


웰빙과 웰다잉, 그리고 ‘나의 시대’-

나는 지금도 고민한다. 나의 시대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내가 가진 역량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10월 10일 그동안 공들였던 ’시간속의 시간‘팀으로 플룻과 피아노의 듀오콘서트,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콘서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고민하며 글을 쓰고, 진심을 다해 음악을 만들고, 때로는 삶의 속도를 줄이며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 모든 것들은 사실, 나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마지막을 그려야만, 오늘을 제대로 살 수 있다.


나는 이제 웰빙을 단지 ‘건강한 삶’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 있는 삶’이며, ‘타인과 연결된 삶’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깨어있는 삶’이다.

그리고 웰다잉은 그런 삶의 자연스러운 완성이다.


나는 아직도 힘겹게 매일 아침 수영장에 간다.

어머니와 나란히 아쿠아 운동을 하고, 나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해 헬스장을 찾을 것이다.


그건 내 삶의 방향을 묻는 일이자, 나의 시대가 향해야 할 중심을 붙드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이런 말로 내 삶을 정리하고 싶다.

“나는 잘 살았고, 그래서 잘 떠날 준비가 되었다.”

그게, 웰빙이고 웰다잉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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