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인문학' 독서노트를 다시 읽고

by 고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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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님의 명저다. 우석님의 초창기 글을 읽었을 땐 붇카페에 종종 출몰하는 '관종'중의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다. 언제나 로켓을 뻥뻥 쏘아올리던 사진이 있었다.


이번에 오스틀로이드님 카페에서 경제분야 책읽기로 이 책이 선정되었다. 게을러 책을 다시 읽긴 귀찮고, 예전에 썼던 독서노트를 찬찬히 읽었다.


https://blog.naver.com/pyowa/221801951030


역시 대단한 책이다. 어디하나 허투루 쓴 문장이 없다. 문장 자체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이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인문학적인 사람이 되었다. 우석님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 봐야한다고 말했다. 거장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요즘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읽고 있다. '노예의 길'을 읽으며, 문장마다 놀라고 있다.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탄 느낌은 이런것이구나 깨닫고 있다. 리카도의 '지대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맬서스의 '인구론', 밀턴 프리드먼, 칼 막스, 케인즈의 책도 읽어봐야겠다.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 가난한 환경의 사람들은 부자되기 어렵다. 가난하다고 통찰력이 떨어지겠는가? 그렇지 않다. 열정이 떨어지겠는가? 그렇지 않다. 더 절실하다. 그럼에도 가난할수록 가난을 극복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빈자의 주변엔 부자가 없기 때문이다.


가난해도 부자의 줄에 서야 한다. 부란 가난한 사람들끼리 연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빈자들끼리 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꼴찌그룹이 모여 서울대 가는 법을 토론하는 것과 같다. '나중에 온 이 사람'을 위한 자리 같은 건 없다. 직장이건, 친목모임이건, 강의를 듣건, 카페이건 간에 어떻게든 부자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야한다. 부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느껴봐야 한다. 오스틀로이드 카페회원들의 댓글을 읽을 때, 재테크 강의장에서 귀하게 자란 젊은이의 빛나는 눈빛을 볼 때 나는 놀란다. 반포에서 압구정을 가기위한 치열한 고민을 보며 놀란다. 압구정 자산을 어떻게 나눠줄 것인가 시물레이션 해보는 부모의 진지함에 감동한다.


가난해도 부자의 줄에 서라. 제발 줄이라도 서라.


줄서기가 쉬운가. 어렵다. 본능대로 살기 쉽기 때문이다. 가난하게 사는 게 제일 쉽기 때문이다. 본능대로만 살면 저절로 가난하게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수가 가난하고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신분제가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에 대한 핑계꺼리를 찾을 수 없다. 오로지 내 탓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일수록 거시적으로 논하고, 거시적으로 움직인다. 미시적으로 움직일 통찰력이 없기 때문이다. 판단결과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런데 무턱대고 열심히, 열심히 하면 어떻게 되나? 빨리 망한다. 원리도 모른 채 열심히만 하면 빨리 망할 뿐이다. 투자에 공식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과거는 공식으로 설명된다. 과거이기 때문에 설명된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공식따윈 나중에 갖다 붙여넣는 인형눈깔 같은 것이다. 애널리스트, 부동산 전문가, 고위관료 모두 과거를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예측이 달라지면 뻔뻔하게 둘러대거나, 언제 그랬냐는 듯 '거봐 내가 뭐랬어'라고 말한다. 그들의 몇 달 전 유튜브만 봐도 얼마나 허당인지 바로 알 수 있다. 허당이라기보다는 허세라 할만 하다. 미래는 현재에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식’이 아니다. ‘통찰력’이다.


어찌되었건 나는 부동산에 관심이 있다. 부가 어디에서 오건, 부자는 부의 길에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이익이 나오는 길목에 버티고 있을 것이다. 큰 이익은 독점에서 나온다. 생산되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모두가 참여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이익이 나온다. 그것은 무엇인가. 땅이다.


https://blog.naver.com/pyowa/2218019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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