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인생의 역사, 신형철)(2/3)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2942772084


93년 일병 첫휴가를 나왔다. 초성리역에서 비둘기호를 탔다. 나에게 주목하는 어떤 시선도 없다는 자유가 벅찼다. 동두천을 지나 의정부역에 내렸다.


잠시 세상이 멈춰 정지화면이 되었다. 물고기의 눈처럼 360도 전체가 한 번에 느껴졌다. 빨강, 노랑, 파랑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계단에 가득했다. 6개월 동안 바닥에 팽개쳐진 나의 생활 따윈 무슨 상관이냐는 듯 시간은 평온히 흐르고 있었다. 국철을 탔을 때도, 집에 들어섰을 때도, 학교 친구들을 만났을 때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시간은 평온히 흐르고 있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이후로도 실패와 패배를 반복하며 살아왔다. 실패와 패배라는 멋진 말보다는 찌질하게, 위축되며, 어쩔줄 모르며, 그마저도 아닌 척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평온히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기 살기 바빴다.


한강의 <서시>에 운명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서시' 중 일부, 한강)


나는 뭐라고 답할까. 원망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다. '운명' 자체가 '나'니까. '운명' 스스로도 뭘 결정할 순 없었을테니까. '운명'은 찌질하게, 위축되며, 어쩔줄 모르는 나에게 또다시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내 '운명'도 그러는 내가 안타까웠겠지. 어떤 때는 자랑스러웠겠지. '운명'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나는 장면도 상상하게 된다.


내 운명과 내가 얼마나 애틋하건 그렇지 않건, 기러기들은 다시 집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quote-whoever-you-are-no-matter-how-lonely-the-world-offers-itself-to-your-i.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저기 우리 아파트 보인다'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