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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Jun 01. 2023

서울 유학생활

(여덟번 째 집)(1/2)

https://blog.naver.com/pyowa/223111009392


1987년 아버지가 곗돈을 탔다. 아버지는 아들 서울 유학을 결심했다. 곗돈으로 탄 600만 원으로 서울 사당동에 전세방을 구했다. 600만 원은 큰 돈이지만 서울서 방얻기에는 당시에도 작은 돈이어서 자취방은 너무나 허름했다. 있는 돈 없는 돈 모아 방을 구했으므로 세간살이는 더욱 허름했다. 처음엔 나, 여동생,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고모 이렇게 셋이서 살기로 되어 있었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부모님과 자취방에 갔다. 야한 영화포스터가 끝도 없이 이어진 담벼락을 지나 초등학교 바로 옆이 있는 집에 도착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집과는 너무나 달랐다. 너무나 열악했다. TV로 보던 서울집과는 많이 달랐고, 시골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주택이었다. 집 주인은 2층에 살고, 1층에는 문방구와 여러 자취방이 빙둘러져 다닥다닥 붙어 있어 주택이라기 보다는 건물같았다. 

 

세를 준 집은 여섯 집 넘어 있었는데 재래식 화장실 두 개를 공동으로 쓰고 있었다. 공동화장실은 처음 쓰는 거라 어린 마음에 무서웠다. 볼 일은 왠만하면 학교에서 보고 왔다.

 

자취방 출입문은 알미늄과 불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뻑뻑해 꽉 당겨야 했다. 출입문을 열면 부엌이었는데 한 평 정도로 작았고, 가늘고 긴 모양이었다. 부엌에는 석유곤로, 연탄아궁이, 낮은 그릇장, 그리고 연탄이 쌓여 있었다. 

 

부엌에는 창 있었지만 성긴 철망으로 되어 있어 눈이 오면 눈송이가 철망 사이를 빠져나와 사뿐이 부엌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부엌에서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씻고, 난방을 했다. 부엌에서 씻었는데 유리창이 없으니 밖에서 소리도 들리고, 서 있으면 얼굴이 보였다. 부엌 창문 아래 쪽에 쪼그려 앉아 씻었다. 창문이 뚫려 있으니 겨울에 부엌은 외부 온도와 같았고 모든 게 얼어 있었다. 얼지 말라고 쫄쫄 틀어놓은 수돗물로 씻을 때는 너무나 손이 시려웠다. 여름에는 뚫려진 창으로 벌레가 들어왔다. 이름도 모를 벌레들이 부엌과 밖을 제 집 드나들 듯 오갔다. 

 

벌레만 오는 게 아니었다. 쥐도 언제나 찾아왔는데 배수구로 기어 올라왔다. 배수구는 커다란 PVC 파이프가 일자로 박혀 있었는데 악취과 함께 종종 쥐도 올라왔다. 쥐를 막으려고 커다란 돌멩이를 올려 놓아보았지만 학교와 갔다 오면 여지없이 돌멩이는 배수구 구멍 밖으로 밀려져 있었다. 쥐가 어떻게 그렇게 힘이 좋을 수 있는 지 놀라웠다.

 

연탄 아궁이 옆에는 그릇장이 있었고 그 옆에는 연탄 놓는 곳이었다. 부엌이 작아 대부분의 연탄은 지하 보일러실에 쌓아 놓았고, 부엌에는 일주일 정도치만 갔다 놨다. 지하보일러실은 항상 연탄가스로 가득 차 있었다. 잠수하듯이 밖에서 지하보일러실 안에서는 숨을 꾹 참아야 했다. 연탄은 내 담당이었는데 학교 갔다와도 꺼지지 않도록 강약조절을 잘 해야했다. 혹시나 꺼지면 신혼이었던 옆집 아주머니가 불붙은 연탄을 기꺼이 주시고 대부분 다른 연탄을 받지도 않으셨다.

 

다음 해 쯤 어머니가 가스레인지도 설치해주시고, 연탄불로 물을 데우는 기계를 사주셔서 나도 조금은 서울사람처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때의 부모님보다 나이가 더 많아진 지금, 그 때 부모님은 얼마나 우리가 걱정이었을까. 가스렌지 사 줄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때는 성적도 형편없었을 때인데, 서울유학이라는 당신들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얼마나 흔들리셨을까. 아이를 키우는 50대가 되어보니, 당시 모든 걸 짜내면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40대의 부모님이 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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