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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Jun 01. 2023

남매에게 주어진 39초

(여덟번 째 집)(2/2)

https://blog.naver.com/pyowa/223111107471

https://blog.naver.com/pyowa/223111009392


부엌에 외풍이 솔솔 드는 방문이 있었다. 부엌과 단차가 꽤 있어 방에 들어가려면 성큼 올라가야 되었다. 두 평 정도 되는 방이었는데 책상 2개, 서랍형 옷장 1개, 밥통, AM라디오가 있었다. 

 

책상 하나는 어디서 난 건지 모르겠고, 나머지 하나는 고모가 가져온 건데 결혼할 때 두고 간 것이다. 서랍장은 베이지색으로 꽤 큰 거였는데, 어머니가 중고로 5000원에 사서 리어커에 실어 오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제재소에서 짜오신 거친 책꽂이에 2권으로 된 국어대사전이 꼽혀 있었다. 

 

저녁에 내일 도시락까지 싸서 넣어 두던 밥통이 있었고, 카세트와 FM은 고장나서 AM만 들을 수 있었던 삼성카세트가 있었다. 밤 9시에는 ‘가위바위보’라는 하이틴 라디오를 들었고, 10시가 되면 익숙한 시그널 음악과 함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다. 티비는 없었다. 냉장고가 있었을 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에서 부엌위에 있는 다락으로 기어 올라갈 수 있었다. 아주 작고 낮아 겨우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방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커다란 서랍 같은 다락이었다.

 

바퀴벌레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있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잡아보았지만, 바퀴벌레라는게 잡아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금새 알 수 있었다. 잡으면 옆 집에 있던 바퀴가 빈 공간을 채워나갔다. 바퀴벌레는 오지 못하게 밀어내야 한다. 붕산을 섞어 카스테라 빵 반죽을 뿌려 놓으니 바퀴벌레가 많이 사라졌다.

 

부모님은 3일에 한 번씩 전화를 하라고 했다. 3일에 한 번씩 여동생과 둘이서 DDD 공중전화 박스에 갔다. 100원에 13초였다. 그때 중고생 버스비가 90원이었으니까 엄청나게 비쌌다. 어머니는 300원 이내로 전화하라고 하면서 전화비를 주고 가셨다. 남매에게 주어진 시간은 39초. 내 목소리, 여동생 목소리를 들려주고, 어머니, 아버지 목소리를 듣는데 39초면 충분했다.

 

어느 날 여동생과 나는 복권을 샀다. 나는 중3이고, 여동생은 초등학생이었다. 용돈 개념도 없었는데 아마 친척분이 뭐 사먹으라고 준 돈이었을 것이다. 복권이 되면 부모님 고생도 덜하고, 서울에서 평범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복권을 샀는데 티비가 없으니 맞춰볼 수가 없었다. 여동생과 나는 복권방송을 보러 가전 판매점을 찾았다. 인도에 서서 복권을 맞춰봤다. 물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 재미있는 리어카 장사 아저씨가 있었다. 그 분은 어떤 과일을 팔아도 ‘비타민의 왕자’였다. 언제나 들어도 참 재밌었다. ‘비타민의 왕자, 딸기가 왔어요.’, 다음 날은 ‘비타민의 왕자, 사과가 왔어요.’, 그 다음날은 ‘비타민의 왕자, 참외가 왔어요.’ 전혀 어색해하지 않으셨다. 생각해보니 왕자가 여러명일 수 있겠다. 어느 날은 계란을 파셨는데 ‘주먹만한 계란이 왔어요’를 외치다가 갑자기 애드립을 날리셨다. 듣고 한참을 웃었다.

 

‘주먹만한 계란이 왔어요. 주먹만한 계란이 왔어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나의 서울생활은 금새 익숙해 지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새벽에 잠깨어 물을 마시러 부엌문을 열었는데, 머리가 핑 돌더니 서 있을 수가 없어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다. 방에 연탄가스가 샌 것이다. 우리 집 부엌은 유리창이 없으니 다행히 부엌은 맑은 공기였다. 내가 방문을 열면서 쓰러지는 바람에 방에 있던 연탄가스는 모두 부엌으로 빠졌다. 여동생과 고모가 머리가 띵해서 일어나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삶에서 아찔한 장면 중의 하나다.

 

지금 돌아보면 위축되었던 순간도, 위태로웠던 순간도 많았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았고, 그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즐겁게 지냈다. 부모님께서 아직 그 동네에 살고 계신다. 가끔 자취했던 집과 DDD 전화기 자리에 가본다. 집은 신축건물로 바뀌었고, DDD 전화박스는 사라졌지만, 터 만으로도 나는 위로가 된다.


https://youtu.be/tK2ejYyGt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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