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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Jun 22. 2023

고리오는 언제나 겨울처럼 살았다.

(고리오 영감, 발자크)(2/2)

https://blog.naver.com/pyowa/223136031431


https://blog.naver.com/pyowa/223131140552



죽음은 모든 것을 없음으로 만든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 없으니, 삶의 전부를 잃는 일인데도 배울 수 없다. 부자건 빈자건, 행복하건 불행하건 죽음은 공평하게 다가온다. 절실하지 않은 죽음은 없다.



고리오 영감은 죽어간다.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두 딸에 쏟아부었지만, 두 딸은 고마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더 희생할 수 있다고 여겼다.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던 그 순간에도 삶의 우선순위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고리오 영감은 죽었다. 장례식에도, 안장식에도 두 딸은 오지 않았다. 두 딸은 체면을 위해 각자 집안을 대표하여 빈 마차를 운구행렬의 뒤에 따라가게 했을 뿐이다.



고리오 영감은 가족간에도 당연한 것은 없음을 깨달았다. 돈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희생의 과정은 고리오 영감의 결말로 빛이 바랬다. 돈이 떨어지자 딸들의 따뜻한 눈길이 차가운 회색빛으로 변했다. 돈을 가져다 주면 잠깐 녹았다 이내 차가워졌다. 이후에 고리오는 언제나 겨울처럼 살았다.



세상은 결과로 말한다. 과거나 과정은 현재의 결과에 묻힌다. 드러나 있어도 과거나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빛나는 결과, 초라한 결말만 보일 뿐이다. 고리오의 지나친 희생은 딸의 악덕을 만들어냈고, 자신의 삶을 실패로 몰아갔다. 과정에 우리 자신을 희생해선 안 된다. 어느만큼은 자신을 돋보이게 해야한다. 우리는 그럴 권리와 의무가 있다.



고리오 영감을 보며, 자연스럽게 '에브리맨'과 '이반일리치의 죽음'이 떠올랐다. 상황과 과정은 달랐지만 조금씩 죽어가는 사람들의 당황스러움, 원망, 깨달음이 같은 결을 띠고 있다. 마지막에 그들이 원했던 것은 애틋한 눈길과 따뜻한 체온이었다. 죽음은 그런 것인가 보다.



고리오 영감 이외에 인상적인 두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법대생 '라스티냐크'는 성공의 의무감에 휩싸인 청년이다. 청년 학생답게 갈팡질팡하고, 이성적인 척하다가도 감각에 휘둘린다. 탈옥수이면서 현자인 '보트랭'은 라스티냐크에게 삶의 의미를 전달하려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보트랭은 하숙집 사람의 밀고로 경찰에게 잡혀간다. 라스티냐크는 젊은 시절의 발자크가, 보트랭은 중년의 발자크를 느낄 수 있다.


https://blog.naver.com/pyowa/223095488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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