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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Jun 25. 2023

모든 것은 순간이다. 바쁠일이 무엇인가.

(방랑, 헤르만헤세)

https://blog.naver.com/pyowa/223138319526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요양객'에는 '방랑', '요양객', '뉘른베크르 여행' 이렇게 세 편의 에세이가 실렸다. '방랑'은 전쟁포로 구호사업 을 할 때 썼던 글이다.


생각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느낌도 마찬가지다. 관찰하고, 머릿속에서라도 문장으로 말해봐야 한다. 말을 하며 생각이 구체화되고, 없던 생각이 떠오른다. 머릿속의 말을 입의 말로 하면서 생각은 한 번 더 새롭게 떠오른다. 글로 쓰면 다시 한 번 떠오르고, 글을 고치면서 생각은 구체화되고 감각적이 된다.


생각이란 글을 쓰고, 말을 하고, 관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유뷰트 보고, 인터넷 기사를 읽을 때도 생각은 하겠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인식에 불과할 뿐이다. 유튜브나 인터넷 기사에는 아무런 관찰도 필요 없으며, 떠올라 밀고 나오려는 생각도 말이나 글로 잡아채지 않으면 이내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거기엔 생각이 없는 것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살고 있어도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여름날 경주 불국사에 갔었다. 불국사 뒤 쪽 숲길을 걸었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그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가 가득채워졌다. 내 숨소리, 바람이 귓바퀴를 지나가는 소리, 내 발에 흙이 밟히는 소리, 박자를 타고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나뭇잎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서로 비벼지는데도 소리의 개별성을 잃지 않을만큼 섬세했다. 나뭇잎은 한 덩어리가 된 듯 바람의 흐름을 소리로 보여줬다. 고개를 올려 흐름을 눈으로 보려 했지만, 나뭇잎만 가득할 뿐 눈으로 보이진 않았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잊혀졌던 많은 것들이 다시 떠올랐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지금이 인생의 한 장면이 되겠구나고 직감했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소녀가 아름다운 것은 그때가 그리 길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음, 열정, 사랑도 마찬가지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다. 우리는 모두 유한 속에서 살아간다. 젊음, 열정, 사랑은 모두 변해버리겠지만, 젊음, 열정, 사랑은 조금씩 변형되어 계속 우리곁에 있을 것이다. 관찰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지 않으면 무엇이 곁에 있는 건지, 무엇이 변해가는 건지 알기 어렵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바쁠일이 무엇인가.


'방랑'을 읽으면서 오솔길을 차분히 걷고 있는 헤세가 그려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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