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에서 살아남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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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하지 않는 듯 설득하는>
감사관을 설득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잘 모르는 모양인데요.’, ‘뭔가 오해가 있는데요.’ 하면서 말을 꺼낸다. 아마도 오해한 부분을 알려주고, 잘못을 일깨워주면 감사가 잘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더 나아가 숨은그림찾기 하듯 ‘이건 잘못되었다.’, ‘이 부분은 틀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나는 가끔 강의를 할 때 천동설과 지동설 이야기를 꺼낸다. 오늘날 지동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1530년경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천동설을 믿었던 많은 사람들은 설득되었을까. 그 많은 과학자, 신학자들이 새로운 진리에 놀라며 크게 깨달았을까. 천동설을 주장하며 살았던 그동안의 자신을 부정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들은 지동설의 오류를 찾아내고, 천동설의 오류를 보완해 나갔다.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한 이후에도 천동설을 한참을 버텼다. 어떻게 천동설에 지동설로 바뀌었는가. 시간이다. 천동설을 믿었던 사람들이 늙어 죽고, 지동설을 믿는 젊은 세대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업무이건, 신념이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직급이 높거나, 직장경력이 길거나, 전문가라는 분들을 감사할 때가 있다. 이 분들 중 몇몇은 감사관을 가르치려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감사관과 자존심 싸움을 하기도 한다. 자신이 더 많이 안다는 것이다.
감사에 있어서만큼은, 감사관은 감사관이고, 피조사자는 피조사자다. 거기에 직급과 경력이 들어갈 곳은 없다. 감사방향 결정이나, 감사판단도 여전히 감사관만이 한다. 직급이 높아도, 직장경력이 길어도 피조사자라는 자신의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감사관을 가르치려 하거나 감사관과 다투어서 얻을 건 없다.
예전 직장동료 중 별명이 ‘그게 아니고’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시작하건 ‘그게 아니고’로 시작한다. 같은 취지의 말인데도 남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니면 그 중간에 끼어들어, ‘그게 아니고’라며 말을 채간다. ‘그게 아니고’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반대의 분도 계셨다. 내가 모셨던 과장님이었는데, 과장님은 무슨 말을 하든 ‘그러니까’로 시작했다. 분명 반박하거나, 모순의 관계인데도 습관적으로 ‘그러니까’로 말을 시작했다.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인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안 나빴다.
‘그러니까’, 감사관에게 ‘그게 아니고’라며 숨은 그림 찾듯 틀린 부분을 지적하지 말자. 숨은 그림을 찾아 지적한다고 감사관의 판단이 바뀌겠는가. 오히려 자신에 대한 감사처분요구서만 틀린 부분 없이 완벽해질 것이다.
내 어릴 적 초등학교 ‘자연’ 시간에 설탕물 실험을 한 적이 있다(과포화용액 실험이다). 비이커에 담겨있는 설탕물을 달구어 찬물보다 더 많이 녹인다. 이때 실로 모양을 만들어 비이커에 넣는다. 설탕물을 식히면 과포화된 설탕은 다시 설탕 알갱이가 되는데, 알갱이는 실 모양대로 예쁘게 맺힌다.
감사관을 설득할 때도 설탕물처럼 해야 한다. 잘못 감사하고 있다고 반박할 것이 아니라, 감사관의 막연했던 생각들이 자신이 말한 논리에 엉겨 붙도록 논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생각이 결정으로 구체화되기 전에 먼저 논리와 방향을 슬쩍 보여주는 것이다. 감사관도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했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반대편으로 기울었던 감사관의 생각도 여러방향 중의 하나였을 뿐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설득은 무엇인가. 설득당하는 사람이 설득당했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바로 그들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감사관이 되어 생각해 보는 것이다.
판사는 재판의 결과로 판결문을 쓰지 않는다. 판결문을 쓰기 위해 재판을 진행하여 변론을 종결한 후 판결문을 쓴다. 검사는 공소장과 불기소장이라는 문서를 생각하면서 수사를 끌고 나간다. 수사를 종결한 후에 공소장, 불기소장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관도 판사, 검사와 같이 감사보고서라는 문서를 생각하면서 움직이다. 그들은 진실을 찾아 헤매는 탐정이 아니다.
감사보고서에 초점을 두어 감사관의 입장으로 설득해야 한다. 감사관에 쓰기 어려운 논리는 내심 수긍이 가도, 감사보고서에 반영이 되지 않으니 무의미하다. 신고자이건, 피해자이건, 피조사자이건, 누구의 주장이건 같다. 감사관이 비빌구석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감사보고서로 감사실장과 기관장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감사관은 확실하고, 안전하고, 쓰기 쉬운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자신이 만약 감사관이라면 자신의 논리, 주장, 증거를 감사보고서로 쓸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거기에 어떤 위험이나 오해를 살만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니까, 감사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감사실장, 기관장, 신고자, 피해자, 피조사자, 노동조합 같은 제3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항의를 받는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보고, 논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마치 감사관도 최초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생각하도록 말이다. 설득하지 않는 듯 설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