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 자전거여행)(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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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적막하지 않으면 산이 아니다. 산의 아름다움은 오직 적막을 바탕으로 해서만 말하여질 수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유럽알피니즘의 거장이다. 그는 히말라야에 몸을 갈아서 없는 길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늘 혼자서 갔다. 낭가파르바트의 8,000미터 연봉들을 그는 대원 없이 혼자서 넘어왔다. 홀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호텔 방에서 장비를 점검하며 울었다. 그는 무서워서 울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앞쪽으로는 진로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 길은 다만 길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물리적 자연은 근본적으로 몰가치하다. 물리적 자연이 그 안에 윤리적 가치를 내포한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것은 영원한 인과법칙의 적용을 받는 자연과학의 자리일 뿐이다. 이 무정한 자연이 인간을 위로하고 시간을 쇄신시켜주는 것은 삶의 신비다."
정상의 영광을 포기하고, 퇴각이라는 생존을 결정하는 매스너를 떠올려 본다. 단독등반은 무모하다는 주변의 조언과 비아냥을 들으며 호기롭게 캠프를 떠났다. 단독등반이니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길을 뚫고 베낭을 올렸을 것이다. 성공의 가능성이 실패의 가능성으로 조금씩 기울때 매스너는 결정해야 했다. 성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 포기해야 살아 돌아갈 수 있다. 매스너는 하산을 결정했다. 울면서 로프를 거두어가며 하산했다. 그간의 고생과 시간과 돈을 매몰시키고, 수많은 조언과 비아냥 속으로 돌아가야했다.
포기는 무기력하게 시드는 것이 아니다. 그 무엇보다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몸이 약해지면 의지도 약해진다. 의지가 약해질수록 포기도 어려워진다. 현상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시들어간다. 버티는 삶을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안위하게 된다. 포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최선만 다하기는 얼마나 편안한 결정인가.
"산다는 일의 상처는 개별성의 훼손에서 온다. 자존의 거리를 정확히 유지하면서 숲을 이루어, 나무들의 개별성은 숲은 전체성 속에 파묻히지 않는다.
안면도의 소나무들은 과도한 풍류와 과도한 표정을 안으로 다스려 가면서, 높고 곧고 푸르다. 식물사회학 책을 보니까, 나무들도 살기 다툼의 결과로써 개체 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는데, 키 큰 나무들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다툼이 아니라 평화의 모습으로 서늘하다. 이 존엄하고 싱그러운 개별성을 다 합쳐가면서 숲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안면도 소나무의 붉은색은 빛을 내뿜는 색이 아니라 빛을 나무의 안쪽으로 끌어들여 숨기려는 붉은색이다. 그래서 안면도 소나무숲 속에서는 앞을 바라보면 붉은 숲이고, 위를 쳐다보면 푸른 숲이다."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조직생활하기란 어렵다. 조직의 사람들은, 특히 윗사람들은 직원들이 자신과 같은 궤도로 자신의 뒤를 따라 공전하기를 원한다. 누군가 자신의 궤도를 가지고 운동하고, 음악하고, 독서하고, 재테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앞에서는 자기계발로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들의 궤도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의 궤도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의 무기력함과 게으름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술마시고, 티비보고, 유튜브보고, 게임하고 수다떠는 동안 그들이 자기계발하는데도 그들의 궤도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저 회사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자신의 궤도가 가장 존엄해야만 한다. 그러니 조직생활을 하면서 자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직에 파묻히지 않는 삶은 힘든 일이다. 살아보니 그건 '미움받을 용기'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 속에서, 빛은 사람을 찌를 듯이 달려들지 않는다. 나뭇잎 사이로 걸러지는 빛은 세상을 온통 드러내는 폭로의 힘을 버리고 유순하게도 대기 속으로 스며든다.
이 세상의 어떠한 숲도 초라하지 않다. 숲은 그 나무 사이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신성하고, 현실을 부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불온하다. 가장 늙은 숲이 가장 새로운 숲이다. 숲의 힘은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어서, 숲 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고 시간은 병들지 않는다.
봄의 산은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로워서, 지나간 시간의 산이 아니다. 봄날, 모든 산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산이고 경험되지 않은 산이다. 그리고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 과학이다."
빛은 직선이라는데, 빛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데, 숲속의 빛은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돌아오는 느낌이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며 한 박자 쉬었다 오는 느낌이다. 같은 밝기지만 눈이 부시지 않고, 볼에 닿은 빛의 감각도 보드랍다. 숲속에 가면 바람 소리가 난다. 바람과 나뭇잎이 흔들거리며 빛을 부드럽게 하는 모양이다.
"서울의 종묘 숲이나 경주의 계림, 반월성의 숲은 신성한 숲이다. 그 숲은 깊은 산속 무인지경의 숲이 아니라, 사람 사는 동네와 잇닿은 마을의 숲이다. 울창한 숲이 신성한 숲이 아니고, 헐벗은 숲이 남루한 숲이 아니다.
숲은 가까워야 한다. 숲은 가까운 숲을 으뜸으로 친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로키 산맥의 숲보다도 사람들의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정발산(일산 소재)의 숲이 더 값지다. 숲은 가깝고 만만하지만, 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곳이 여전히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포장길은 인간이 만든 길이어서 보지 않고도 다 그려볼 수 있다. 실제로 보아도 그려본 것과 같다. 예상밖의 어떤 것도 없다. 가까운 숲을 걸어본다. 숲은 조용하다. 내 발자국 소리와 내 발바닥에 밀리는 흙의 소리가 들린다. 나무의 뿌리, 돋아난 이름모를 풀, 떨어진 낙엽, 푸드득 날아가는 새들이 있다. 비록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지만 자연속의 나는 잠시잠깐 주인공이 된다.
"생활을 좀 밀려내기란 이렇게 어렵다. 새로운 삶에 대한 유혹이 없다면 누가 비지땀을 흘리며 이 만원 지하철 속 같은 인산을 오르겠는가."
잠시잠깐 일상을 벗어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쉬는 날에 오롯이 홀로 여행하기란 더 어렵다. 나는 '문득여행'이란 이름을 붙여 평일휴가를 내고 여행을 했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작은 시, 작은 읍을 찾아갔다. 외국에서 렌트했다고 생각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운전해 간다. 여행에 어울림직한 음악을 틀어 놓는다. 작은 읍에 도착해 한국말을 쓰는 외국에 왔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낯설고 설레인다. 그렇게 굳은 마음을 먹은 후에라야 조금 생활을 밀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