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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싱싱함은 같다.

(문경새재, 자전거여행)(12)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280299130




눈은 전능하지 못하다. 3차원을 살지만 2차원만 본다. 조각을 빙그르 돌며 감상하여도 2차원의 여러 장면이 누적될 뿐이다.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2차원의 장면들을 상상으로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김훈은 이렇게 썼다.

원근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지상의 한 점 위에 결박하고, 그렇게 결박된 자리를 세상을 내려다보는 관측소로 삼는다. 그렇게 관측된 세상은 납작하다.

(자전거 여행. 김훈.)



글이 쓸 때 나는 자주 드론을 띄운다. 가제트형사처럼 머리 뚜껑을 열어 드론을 날린다. 하늘에서 보는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신호등 건너 아줌마 눈에 나는 어떻게 비칠까. 드론을 멀리 날려보기도 한다. 주변을 한 바퀴 돌게도 해 본다. 그때서야 내가 입체에 살고 있음이 실감된다.


드론을 과거의 순간으로도 보낸다. 막연했던 기억이 3차원이 된다. 어릴적 언젠가 저수지의 수문이 열렸다. 치고나오는 물을 보려고 다리 아래를 내려보았다. 물살 소리가 세상을 덮어버렸다. 소리를 내질러도 내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물은 엄청난 속도로 터져나갔고, 물살은 내 시선마저 끄집고 가버렸다. 멀리 흘러간 시선을 다리 아래로 가져오면 물살은 곧바로 시선을 다시 끄집고 내려갔다. 시선은 방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눈은 겨우 무언가를 볼 뿐이었다. 시선은 물건에 매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매달릴 것이 없으면 눈은 보지 못하는 존재였다. 어린 나였지만 무언가 깨쳤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김훈 작가도 비슷하지 않을까. 약해지는 산세와 넓어지는 개천, 모든 마을을 들르는 길, 단풍을 통해 비치는 빛, 지나는 구름에 생기는그늘. 페달을 밟고 힘에 부쳐 기어를 낮춰가면서도 김훈은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길을 어떤 모양으로 헤쳐가고 있는지 이리저리 돌려봤으리라. 산과 길은 지나가는 자전거를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반드시 그랬으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드론을 지금 띄우건, 과거로 보내건 새로움과 흥미진진함은 다를 것이 없다. 그때의 빛이건 지금의 빛이건 그 싱싱함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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