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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진도, 자전거여행, 김훈)(11)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276430433





1597년 2월 26일(음력)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속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1597년 4월 1일(음력) 석방되었다.


이날 난중일기는 '맑음, 옥문을 나왔다'로 시작된다. 있을 법한 임금과 조정에 대한 억울함, 감사와 충성 각오 따위는 쓰지 않았다. 외적을 멸하겠다는 적의도 없다. 맑은 어느날 옥문을 나온 이순신이 있을 뿐이다.


옥문을 나와 아들과 부하를 만났다. 한 문장을 더 썼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그날 영의정, 우의정, 참판, 대사헌이 사람을 보내 위문했다. 영의정, 우의정, 참판, 대사헌을 꺽고 이순신을 옥에 넣은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순신에게 그렇게 적의를 느낀 세력은 누구일까.


전란에서도 관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승진과 보직이었을 것이다. 인맥관리에 돈도 필요했고, 군량과 군마를 많이 모았다는 허위서류도 필요했고, 숨어 있었지만 나가 싸웠다는 공적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전란은 보직과 승진의 또다른 기회였다.


이순신은 그들을 고발했다. 그럼에도 그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세력이 있는 조정에 보고했다. 선조를 곁에서 모셨던 후원자들은 이순신의 고발이 모함이며, 사실무근인 근거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역으로 이순신의 게으름, 허위보고, 전공 가로채기, 강압적 군대지휘를 보고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는 '통제할 수 없는 군사령관'이라고 임금을 겁주었을 것이다. 의심스러우면 임금께서 직접 군령을 내려보시라고 건의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어쩌자고 전란 속에서 관료들을 고발했을까.


'맑음. 옥문을 나왔다'가 무인 이순신을 보여준다면,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는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이순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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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4월 초1일 (신유) 맑음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더 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 (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봤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 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종을 보내고 판부사 정탁 (鄭琢)․판서 심희수(沈禧壽)․우의정 김명원(金命元)․참판 이 정형(李廷馨)․대사헌 노직(盧稷)․동지 최원(崔遠)․동지 곽영 (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난중일기,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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