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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Jan 20. 2024

유언은 살아 있는 동안 실패다.

(유언, 한스 할터)(1/2)

https://blog.naver.com/pyowa/223328581243


유언이 어려운 이유는 죽음이 임박한 줄 알기 어렵다. 의사는 치료가능성을 퍼센트로 분석한다. 가족들은 희망만을 말하고, 심지어는 병을 숨기기까지 한다. 죽임이 감각으로 느껴질때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거나 약에 취해 있게 된다. 모든 감각이 고통으로 빨려들어가 생각마저 제대로 할 수 없다.



유언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정신을 놓는 것이다. 유언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상황이지만, 정신을 놓치는 것은 두려운 상황이다. 더이상 나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는 육체가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언뜻 상상만으로도 무섭다.



정신과 몸이 건강할 때 유언을 해야 한다. 어디에라도 써 놔야 한다. 말할 정도의 기력만 있으면 '어디에 써놨다'고 짧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과 몸이 건강하니 죽음의 순간을 맞지 않을 것이다. 실패한 유언이다. 실패한 유언이니 계속 살아간다. 유언을 더하고 빼면서 새로운 유언을 쓰면 된다. 살아 있는 동안은 실패한 유언이고 죽음이 닥쳐야 유효하다.



책에 나온 사람들은 죽음이 미뤄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짧은 죽음의 연기는 큰 고통의 계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존엄마저도 상실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죽은 사람은 떠나간 사람이다. 에피크로스 학파에서 말한 것이라는데  '죽어가는 이에게 죽음이란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은 이에 대한 불행인 것이다.' 죽음은 죽은 사람의 슬픔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의 슬픔이다.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는 작품이라기 보다는 슬픔이 덩어리로 보인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Kathe Kollwitz,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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