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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Mar 26. 2024

머리칼이 바닥에 떨어지자 살짝 튀어오르며 꿈틀거렸다.

(언니의 폐경, 김훈)

https://blog.naver.com/pyowa/223395890322



'언니의 폐경'은 단편소설집 '강산무진'에 실려 있다. 누군가 '언니의 폐경'을 읽어봤냐고 물었는데, 기억나는 게 없었다. 강산무진에 무슨 소설이 있었는지도 생각나지 않고, 읽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조심스레 책을 꺼냈다. 밑줄도 있고, 메모도 있었다. 블로그 독서노트가 2012년 6월 20일이니 12년전에 읽었던 게다. 글에도 기력이 있는지 독서노트 내용은 빈약했지만 12년전 젊음이 느껴졌다.


생명이 운명을 거치며 늙어간다는 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비가 내리다 밤이 된다한들 내리지 않을 수도 없다. '밤비'라 불린다 불평해도 '밤비'라고 불릴 수 밖에 없다.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김훈의 묘사는 직관적이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남편 애인의 머릿카락을 떼어낸다. 떨어지던 젊은 머리카락이 바닥에서 살짝 튀어오를 때 탄성으로 꿈틀거린다. 함께 살 이유가 없음을 깨닫는다. 운명은 그렇게 주인공을 거쳐간다. 


사내가 다가오자, 그녀는 더 다가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삶은 계속되었다.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었다. 영양상태가 좋아 보였고, 끄트머리까지 힘이 들어 있었다. 올 틈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떼어내자 더운 방바닥 위에서 머리카락은 탄력을 받고 꿈틀거렸다. 젊고 건강한 여자의 나신이 환영으로 떠올랐다.

(언니의 폐경,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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