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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Apr 06. 2024

시간이 많아지니, 애타는 시간은 사라져버렸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https://m.blog.naver.com/pyowa/223407559889


브링리는 관찰하고 상상하며 박물관 보안요원으로 일했다. 그림도, 관람객도, 동료들도 관찰하고 상상했다. 가끔은 자신을 관찰하며 위에서 보면 참 멋진 장면이라고 스스로 감탄했다. 잊혀지기 전에 유니폼에 꼽혀 있던 메모장을 꺼내 쓰기도 했다. 10년을 관찰하고 생각하며 메모했다.

나도 이등병때 초소에서 관찰하고 상상했다. 차분한 나만의 시간이 그때뿐이었다. 기차를 관찰하고, 농부를 관찰하고, 바람과 날씨를 느꼈다. 보초를 마치고 돌아와 짧게 시간내어 생각한 것을 썼다. 하루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상병쯤되자 여유가 생겼지만, 지루한 하루하루가 반복될 뿐이었다. 시간이 많아지니, 애타는 시간은 사라져버렸다.

아름다움은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덩어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 존재한다. 작가가 느꼈을 순간을 떠올려 보고, 등장인물이 모두 주인공인양 각자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은 순간이지만, 작품에는 등장인물만큼, 상상의 능력만큼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현실의 우리처럼 말이다. 순간을 상상해 낼 수 없다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작가의 놀라운 재능에 감탄하면, 작가의 주저함, 실패, 노력은 설 곳이 없다. 작가의 재능으로 작품이 치켜세워지면 작품은 현실성을 잃고, 그만큼 아름다움을 잃는다. 빛이 작가의 눈동자에 어떻게 비춰졌을지, 작가는 왜 그 순간을 그렸을지 사실과 다르더라도 구체적으로 떠올리며 보아야한다.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며 빛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물은 빛에 따라 달리 보인다. 사물이라는 본질이 있는데 빛에 따라 색채만 바뀌는 것일까? 물체와 빛이 합하여 독자적인 '사물'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물이라는 본질이 시시각각 독자적으로 나타나는 신비함을 그리려 했던 건 아닐까? 달리 생각해보면, 물체는 종속변수이고 빛이 본질이 아닐까? 결국 보이고 인식할 수 있는 건 빛이 아닌가.

모든 것은 금새 검색된다. 주변에 작은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이 많이 생겼다. 세계적 박물관은 인터넷 박물관에 고화질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그 검색때문에, 그저 그런 것을 검색하느라 매일의 시간을 써버리고 언제나 시간은 모자란다. 눈앞에서 보이는 것을 관찰하며 상상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하루 중 애타는 시간이 없다. 시간이 많아지니, 애타는 시간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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