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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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홍학지가 쓴 회고록이다. 홍학지는 인사 군수분야 부사령관이었다. 병력보충과 군수지원분야를 담당했기에 전술이나 전투판단보다는 전략전 시각에서의 인사와 군수를 기록하고 있다. 흥미진진하게 쓰여져 군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에서 놓기 어렵다.
한국전쟁의 아군의 군수에 관한 분석은 김철환 대령이 쓴 "군수론"이 있다. 두 권을 읽으면 아군과 적군이 군수의 측면에서 한국전쟁을 어떻게 치뤘는지 알 수 있다.
전쟁은 호언장담으로 시작된다. 쌍방 사령관은 작전계획과 지형적 잇점을 믿는다. 군함과 전투기 등 화력을 자랑한다. 전투는 시작되고 쌍방은 모든 것을 건다. 전쟁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병력, 군수, 보급이 없으면 전략도, 전술도, 용맹도 다 허망한 소리다.
전쟁이 오래 계속된다는 얘기는 서로가 서로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전투의 계속은 군수와 보급을 고갈시킨다. 상대를 이길 능력이 없으니 전투마저 계속 할 수 없다. 전선 유지에 급급하니 전선은 고착된다. 전투는 비정규전 양상을 띠게 된다. 현재의 전선은 미사일, 해공군의 우위가 포함된 전선이다. 화력은 우위에 있다는 말 역시 허망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강력한 해군, 공군을 믿었다. 전차와 야포도 강력한 우위에 있었다. 홍학지 부사령관은 미군에 대해서는 4배의 병력을, 한국군에 대해서는 2배의 병력을 투입했다고 썼다. 미 1개 사단을 중공군 3개사단이 막은 경우 미군도, 중공군도 모두 승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전쟁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다른 나라의 전쟁에 병력과 재산을 소진할 순 없었다. 정전협상에서 미군과 중공군은 다퉜다. 미군은 잠재적 전력 우위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중공군은 당신네의 해공군이 반영된 것이 지금의 전선이라고 맞섰다. 미군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전투는 다시 계속되었다. 미군은 전선의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미군은 다시 협상테이블로 돌아왔다. 더이상 잠재적 전력우위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총구가 맞닿는 현재의 전선을 기준으로 협상하기 시작했다.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은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어 놓았다.
협상은 지리하게 계속되었고, 협상이 끝날때까지 전쟁도 계속되었다.
中國人民志願軍 Chinese People's Volunteers 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비정부군대라는 성격을 확실히 하였다. 말 그대로 중국민간인들이 자원해서 조선에 들어가 조선정부의 지휘를 받아 전투를 벌인다는 뜻이다. 모두들 인민해방군 모표, 흉장을 떼어냈다. 간부들은 조선인민군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선서의식을 거행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연대, 모든 사단, 모든 군, 모든 병단이 지원군에 가입했음을 선서했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저희들의 분석으로는 아군의 화력이 약해 유엔군의 화력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미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데 아군 2개 군(약 6만명)이 필요하고 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데 아군 1개 군(약 3만명) 투입이 예상됩니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미국은 그들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미신처럼 믿고 있었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전략중점을 유럽에 두고 있더 미국은 더 이상 많은 병력을 조선에 투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또다시 공격을 감행하더라도 실패할 가능성이 많고 도리어 조선반도에서 쫓겨날 가능성을 우려했던 것 같다. 즉 미국의 근본이익이 유럽에 있는 만큼 아시아에서 지구전에 들어가 유럽에 배치되어야 할 군사력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된다면 이는 바로 소련의 크렘린 궁이 바라는 바이다. 전쟁은 한국으로 제한하고 해공군력을 제한하며, 더 이상의 증원부대를 파견하지 않고 38선 부근의 전선에서 머무른 뒤 휴전을 꾀해 6.25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자는 속셈이었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나는 역사상 승리하지 못한 정전협정에 조인한 최초의 미육군 사령관이었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아이스크림 고지에 대한 홍학지의 설명]
교전쌍방은 3.7제곱킬로미터의 좁은 땅을 놓고 엄청난 병력과 화력을 투입했다. 상대(국군)는 병력 6만여명, 대포 300여문, 고사포 47문을 투입했다. 190여만 발의 포탄과 5천여개의 폭탄이 투하됐다.
문제의 두 고지의 흙은 폭탄 때문에 1-2m 씩 내려앉았고 시뻘건 황토가 전부 회색으로 변했다. 지상진지가 전부 폭격이나 포격에 무너져 내려 땅굴진지의 길이가 3-4m씩 짧아졌다. 이 전투는 쌍방이 몇 개 사단 병력을 투입해 2개 중대 진지를 뺏으려 했던 것으로 전투시간의 장기화, 화력의 치밀함, 전투의 긴장감이나 잔혹함으로 세계전쟁사상 보기 드문 것이었다. "
(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