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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참깨를 털던 시절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825432336


'참깨를 털면서'를 읽다가 어머니와 참깨를 털던 일이 생각났다. 우리 집은 남의 집이었는데, 집에 살아주면 밭 3마지기 정도 공짜로 지어먹게 해 주었다. 사람이 살아야 집이 무너지지 않고, 공짜밭은 산 밑 다락밭이었으니 사실 지어먹을 사람도 없었다. 지어먹으란 얘기는 밭을 관리해달라는 말이었다. 없는 살람이어서 부모님은 기꺼이 조건을 받아들이셨다.



다락밭은 산으로 삼십분은 걸어야 했다. 마을을 지나 고사리 가득한 습한 숲길을 지나면 볕이 드는 다락밭이 나왔다. 주변엔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다락밭에 참깨를 심었다. 산 속이라 조금 무서운 곳이었던지 10살인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 어머니 서른 네살이었다. 참깨 꽃이 하얗게 피더니, 참깨가 맺혔다. 어머니는 베어 단을 세워 말렸다. 참깨를 터는 날 파란 깔판을 들고 산에 올랐다. 파란 깔판 위에 고동색으로 말린 참깨를 늘어두었다. 그리곤 참깨를 두드렸다.



"참깨를 짜면 들깨보다 기름이 많이 나온단다."하시면서 나에게도 두드려보라했다. 10살 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진 않았겠지만, 나도 이리저리 두드렸다. 내가 꽤 자란 어느날 어머니가 참깨밭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어느 날인가 혼자 다락밭에 갔는데 너무 졸려 잠깐 잠이 들었다. 잠이 깨보니 깜깜한 숲속에 혼자 있더란다. 너무나 무서워 깜깜한 숲속을 허겁지겁 내려오셨다고 했다.



위성지도를 보니 그 집은 없어졌고, 그 밭은 찾을 수 없었다. 숲이 된 모양이다.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만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




그 여자네 집 -김용택 -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띄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크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환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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