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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청명에 산소를 파하고 이장했다.
작년 추석이 끝나고 아버지는 이장하겠다고 하셨다. 날짜도 정하셨다. 4월5일에 맞춰 작은 아버지와 진행하라고 하셨다. 이장할 봉분은 8기였다. 이장업체를 알아보고, 개장신고 준비하고, 화장장 예약하니 준비는 끝났다. 아버지께 당일 계획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힘들어 산소는 못 올라갈 것 같으니 사진을 잘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셨다.
전날 시골에 내려가 숙소에서 잤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그래도 산소에 올라가겠다며 따라오셨다. 유골이 어떤지 하나씩 살펴보시며 일하시는 분들께 이런저런 당부를 하셨다. 7분 유골을 수습하고, 할머니 산소로 이동했다. 할머니 산소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할머니 산소 얘기가 나오면 언제나 울컥하셨다. 그리고 한참을 얘기하셨다. 아버지는 면 소재지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셨다. 가난으로 아버지는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 선생님들의 강권이 있었지만 끼니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할머니는 그즈음 산후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 산소를 세울 형편도 안 되어 먼 산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돌아가신지 10년도 더 지나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할머니 유골을 동네로 모셔오기로 했다. 가난은 여전하였으므로 동네에 산소 세울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남의 밭 위 산자락에 봉분을 세우지 않고 몰래 안장하기로 하셨다.
어느 한 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깜깜한 산을 더듬어 먼 산으로 올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할머니의 유골을 수습하셨다. 할머니 유골을 아버지가 보자기로 싸매셨다. 유골을 싸매고 산 속을 헤쳐왔다. 아버지는 그때 허리춤에서 느껴졌던 할머니의 유골이 너무나 서러웠다고 말씀하셨다.
마을로 돌아와 누구에게 들킬까 소리를 죽이며 할머니 안장을 시작했다. 호미로 조심히 파 관모양을 만들고 할머니 유골을 안장하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흙으로 덮기전에 당신들의 아내이자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것이다. 깜깜해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선명히 보이는 유골을 보며 설움이 북받쳤을 것이다.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가난과 운명이 한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60년이 지났다. 할머니 산소는 30년 전쯤 봉분을 쌓고 호석도 두르고, 석상도 놓았다. 이제 2번 째로 이장하신다. 환한 대낮에 당당히 이장하신다. 4월 4일 80대 중반의 아버지는 파묘를 지켜보고 계셨다. 20대의 당신이 먼 산에서 보자기로 모셔온 어머니의 유골을 60년이 지나 만나고 계셨다.
포크레인 기사가 조심히 파내려 갔다. 명당이라고 전해듣던 자리는 나무뿌리가 이리저리 채워져 있었다. 일꾼들이 달라붙어 삽과 호미로 조심히 파냈지만 유골은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두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서러운 기색이 가득하셨다.
봉분을 모두 파묘하고 8분 모두 군립 수목장으로 모셨다. 돌아오는 차에서 아버지는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하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할머니 산소 이야기가 나왔다.
"니네 할머니가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다. 그때 출산 후였는데도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없이 살아서, 못 먹어서 돌아가신 것이다. 10년 쯤 지난 후 할머니 유골을 보자기에 메고 먼산을 돌아왔다. 누구에게 들킬까 니 할아버지랑 깜깜한 밤에 유골을 수습해서 뒷산에 모셨다. 누가뭐라하면 내 젊은 혈기에 가만두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모셨다. 명당이라했는데 오늘 파보니 나무뿌리는 많고 두상마저 찾을 수 없었다. 돌아가시고도 고생만 하신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아버지, 많이 서운하셨겠어요."
"서운하다 뿐이겄냐."
그렇게 말하곤 아버지는 눈물을 훔쳐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