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멍이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나른하고 따뜻한 시골의 기억 1 편>

by 고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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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은 가축으로부터 태어난다. 그것은 자명한 것이라 논리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가축이므로 주인이 보살핀다. 누군가 그 보살핌이 속박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가축은 태어날 때부터 가축이었으므로 그런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조차 그려지지 않는 말이 아닌 이야기였다. 보살핌의 끝은 죽음이다. 가축의 죽음은 언제나 주인이 결정한다.


우리 집 개는 이름이 없었다. 개 또한 닭, 소, 토끼, 돼지, 고양이와 같은 가축이었으므로 이름은 필요 없었다. 다만 개와 고양이는 우리에서 자라지 않았으므로 최소한 부르는 말은 필요했다. 우리는 그저 ‘멍멍이’라고 불렀다. 멍멍이가 죽으면 새로운 멍멍이를 사왔으므로 멍멍이가 죽고 죽어도 멍멍이는 끊임없이 부활했다. 그래서 나는 멍멍이의 이름에서 슬픔을 느낄 수 없다.


닭, 소, 토끼, 돼지는 자신을 위한 집이 있고 고양이는 아궁이 위의 따뜻한 부뚜막에서 쉬었지만 멍멍이는 자신의 집이 없었고, 사람의 집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가마니가 깔려 있는 마루 밑 뿐이었다. 겨울이 되면 찬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인이 마루 앞쪽에 가마니 하나를 덧대 주었다. 멍멍이에게 마루 밑은 집밖을 향한 전진기지이자 끝까지 싸워야만 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멍멍이는 다른 가축이 누릴 수 없는, 어디에나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있었기에 언제나 당당했다. 가끔 낯선 사람이 나타나 무섭기도 했지만 주인은 언제나 자신의 편이었으므로 크게 짖었고, 너무나 무서우면 마루 밑으로 후퇴해서 힘을 다해 컹컹 거리며 짖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밥 값을 했다.


아이들이 무리지어 안개를 헤치고 학교로 걸어 갈 때 멍멍이도 신이 나 따라갔는데, 아이들은 따라오지 말라고 돌을 던졌다. 맞으라고 던지는 돌은 아니지만 피하는 척, 겁먹은 척하며 실실거리며 따라가다가 동네가 끝나면 다시 돌아왔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다른 개들의 냄새도 맡아 보면서 잘들 있는지 둘러보고 땅속에 뭔가 기어가는 것 같아 여기저기 땅도 파보다가 다시 마루 밑으로 돌아와 벼룩이 있는지 몸이 가려워 여기저기를 긁다가 졸았다.


뭐 재밌는 게 없을까?


마루 밑 마당 건너편에 닭장이 있다. 닭이 알을 낳았다. 닭장 문은 용수철로 되어 있어 밀면 들어갈 수 있고 나올 땐 앞발로 당기면 되었기 때문에 닭들이 문을 열지 못했지만, 나에게 그런 문 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닭장에 들어간다. 닭이 푸드덕 거리며 꽥꽥 소리친다. 어제도 그제도 매일 들어왔는데도 닭들은 익숙해지지가 않는가보다.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도 모르겠다. 막 낳은 알의 따뜻한 느낌이 좋다. 닭장 속의 닭은 알을 품지 않는다. 어떻게 품는 건지 모르는 것 같다. 알의 온기는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무엇보다 그 포근한 따뜻함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깨지지 않게 알을 입으로 집어 물고 앞발로 문을 잡아당긴다. 닭들이 더 푸드덕 거리지만 아마 내일이면 또 잊을 것이다. 나는 닭장에 새로운 알이 보일 때마다 가지고 나와 마루 밑에서 따뜻하게 품었다. 그래서 주인은 알을 찾으러 굳이 닭장에 갈 필요 없이 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마루 밑 가마니에 손을 넣었고 내 뱃속에는 항상 따끈한 알이 있었다. 나는 그 포근함과 주인의 칭찬으로 알 품는 일을 하루도 빠뜨릴 수 없었다.


햇볕 좋은 날엔 주인이 벼룩을 잡아주기도 했고 돌멩이를 던져 찾아오라고 하기도 했다. 벼룩을 잡기위해 귀밑이나 목덜미의 털을 헤치면 간지러우면서도 시원했고 던진 돌멩이는 찾아오지 않아도 그만이었으므로 햇볕의 나른함을 즐기기엔 그만이었다. 모두 일터로, 학교로 가고 나면 아무도 없는 마당에 바람소리만 남았다. 때마침 뺀질한 고양이가 거들먹거리며 지나간다. 그 놈은 쥐를 잡는다는 손톱만한 권세로 부뚜막 위에서 잔다. 그러나 쥐는 여기저기에 계속 보인다. 나야 도둑이 없으니까 잡을 수 없지만, 쥐는 있는데 못잡는 거 아닌가. 자신만이 선택받은 가축인 양 으스대는 그 꼴을 볼 수가 없다. 고양이를 쫓아야겠다. 그 놈은 냅따 안테나를 세워둔 나무로 올라간다. 내가 밑에서 흔들어보았지만 그 정도 흔들림에 떨어질 놈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밑에서 지키면 내려오지는 못하겠지. 주인이 올 때까지는 꼼짝없이 안테나서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위를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에 고양이가 달려 있었다. 나비 한 마리가 보인다. 나는 뒷발로 차올라 나비를 향해 앞발을 휘저어본다. 어림도 없다. 나에게 날개가 생기지 않는 한 나비를 바로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비를 꼬득여 잡는 방법이 유일한데 나비는 멍멍이에게 무관심하고, 나비를 꼬일 미끼도 나에게는 없었다. 내가 나비를 잡는 것은 애초에 될 일이 아니었다.


마당에 개구리 한 마리가 뛰어 들어 온다. 개구리의 도약은 나의 도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개구리의 도약은 겨우 나를 흥미진진하게 할 정도의 속도와 높이다. 허망한 고양이와 나비에 대한 추격은 다음으로 미루고 개구리를 쫓는다. 저번에 밭에까지 개구리를 쫓아갔다 주인에게 맞은 것이 생각났다. 반드시 밭으로 들어가기 전에 잡아야 한다. 개구리도 밭으로 들어가야만 나른한 오후를 지나 저녁까지 살아있을 수 있다. 방향을 연거푸 바꾸어대며 밭으로 밭으로 필사적인 도약을 계속한다. 나도 개구리가 뛸 방향을 예측하며 이리저리 뛴다. 목숨을 건 도약과 그렇지 않은 도약은 대부분 목숨을 건 도약이 이긴다. 개구리가 드디어 밭에 도착했다. 풀 속에 뛰어들어 온 개구리는 숨 한번 돌리고 다시 끄괘괙, 끄괘괙 거린다.


별 것 아닌데 은근히 재밌다.


마당에 찾아오는 손님에는 참새와 제비도 있었다. 내가 사는 마루 위 처마에 제 힘으로, 제 집을 짓고 사는 제비는 사실 손님이 아니다. 제비는 벌레를 먹고 나는 벌레를 먹지 않으니 우리는 다툴 일이 없이 언제나 평온하다. 그러나 이놈의 참새는 항상 내 밥을 탐한다. 내가 없으면 조금씩 조금씩 밥그릇에 다가와 한 알 두 알 쪼아 먹는데 내버려두면 수 십 마리가 쪼아 먹는다. 그러니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래서 그놈들에게는 가끔씩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날개가 달린 놈들이라 쫓아가서 잡을 수는 없으니 오게 하는 수밖에 없다. 남은 내 밥을 밥그릇 채 엎는다. 화선지에 먹물방울이 튀듯이 밥알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튄다. 그러면 나는 꽉 조여진 용수철처럼 잔뜩 웅크리고 숨죽여 기다린다. 용감한 순서인지, 멍청한 순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새가 순서대로 다가온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것이 핵심이다. 여러 마리가 밥그릇까지 다가왔다. 드디어 때가 왔다. 움추렸던 용수철을 튕겨 참새를 덮친다. 앞발도 최대한 빨리 휘둘러 본다. 힘보다는 속도가 중요하다. 휘두르는 앞발에 걸린 참새는 나가 떨어져 마당에 구른다. 잡았다. 나는 얼른 뛰어올라 마당에 누워있는 참새를 앞발로 누른다. 내 밥을 훔쳐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참새들아 잘 보거라.


나는 밥상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지만 밥상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쉽지는 않다. 보지 않더라도 냄새로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고, 내 밥그릇에 주인이 먹다 남은 것들이 그대로 다시 담겨 나왔기 때문이다. 주인의 생일이면 멍멍이 밥그릇에도 미역국이 있었고, 명절이면 내 밥그릇에도 잡채가 있었고, 제사때는 생선뼈가 올라왔다. 특별한 날에는 뼈다귀도 먹을 수 있었는데 이 귀한 뼈다귀를 한꺼번에 다 먹어 치울 수는 없고 놓아두면 어떤 놈이 가져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아무도 몰래 뒷마당 굴뚝 밑에 파묻어놓고 시침 떼고 마루 밑에 다시 앉았다. 뼈다귀를 다시 꺼내먹을 생각을 할 때마다 입꼬리에 침이 흘렀다. 마루 밑에서 머리위의 주인이 혹시나 먹을 것을 던져주지 않을까 항상 귀를 쫑긋거렸고 그늘이 없어 눈이 부신 마당에 먹을 것이 떨어지면 먼저 먹는 놈이 임자였다. 고양이나 닭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므로 음식 냄새가 날 때 졸아서는 안 된다.


주인은 가끔 껌을 마당에 뱉었는데 나는 껌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껌을 집어물고 마루 밑으로 들어갔다. 껌의 질감은 보통의 음식과는 전혀 달랐다. 잘 씹히지만 결국 씹히지 않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삼킬 수가 없었고 나는 입을 다물고 씹을 줄 모르기 때문에 두 세 번 씹고 땅에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 껌은 해가 넘어가도록 씹고 또 씹고, 떨어뜨리고 또 떨어뜨려 마루 밑 가마니 옆에 까맣게 변해서 뒹굴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이들이 마루위에서 피리를 불었다. 피리 소리가 들리면 나는 왠지 모르게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우리 선조의 노래였는지 모르겠다. 우~ 우~ 하며 노래를 불렀다.


멍멍이는 쥐를 잡을 수 없다. 잡기에는 너무나 빠르기도 하고 벽에 붙어 다니니 덩치가 큰 멍멍이로서는 쫓기도 어려웠다. 그 점이 멍멍이가 고양이에게 밀리는 유일한 점이었다. 쥐는 밖에서 스스로 죽지 않는다. 고양이에게 잡히면 먹혀 버리니 볼 수가 없는 것이므로 마당이나 대로에 죽어 있는 쥐는 쥐약을 먹어 죽은 쥐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멍멍이에게 죽은 쥐는 너무나 신선한 횡재이고 고양이의 으시댐을 한방에 날려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마당 가운데 쥐를 한 입에 삼켰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멍멍이는 의식이 조금씩 옅어졌다. 아주머니는 멍멍이가 죽어간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멍멍이를 부엌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평소에 들어가보지도 못하는 부엌의 따뜻한 아궁이 앞에서, 아주머니가 쓰다듬어 주는 행복감 속에서 멍멍이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죽어갔다.


멍멍이 죽음에 대해 옆집 어른들끼리 한판 말다툼이 있었다. 며칠 후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긴 줄에 묶여 있었다. 우리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멍멍이다’고 외쳤다.


그렇게 멍멍이는 다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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